#1
할머니는 꽃을 보고 계셨다. 허리가 굽으신 분들이 흔히 그렇듯 낡은 유모차에 몸을 의지하신다. 나는 그 분을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여러 번 보았다. "할머니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고개를 좌우로 흔드신다. '집에 며느리가 있지만 할머니께 밥을 주지 않는다. 아들은 멀리 일을 나가고 몇 달째 없다.' 우리가 처음 나누는 잠깐의 대화에서 내가 알게 된 정보들이다.
"이 근처가 집이세요?" 여기는 아침을 얻어 먹으러 오는 친구의 집인데 오늘은 친구가 집에 없다고 하셨다. 집에 있는 삶은 달걀과 바나나가 생각났다. 잠시만 계시라고 하고 다이어트때문에 집에 음식이 통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소한 종이가방이 마음에 걸려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 빵과 라면 5개 짜리 세트와 바나나 우유와 초코파이를 사면서 '집에 별 것도 없었는데 들르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라면 끓여 드실 수 있죠?" 고개를 위아래로 흔드신다. "계란은 한꺼번에 여러 개 드시면 체하니까.. 지금 한 개만 드시고 빵이랑 우유 드시고 나머지는 점심에 드세요." 봉지를 손에 쥐어 드리고 그 곳에 5천원짜리 한 개를 넣어 드렸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쌀을 사다 놓아도 그 쌀을 자기 방에 두고 할머니 밥은 해주지 않는다는 그 며느리를 찾아 가고 싶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사정이 있다. 나는 자주 다니는 이 길을 좀 더 일정한 시간대에 이용해야 겠다는 다짐만 하면 된다.
#2
구멍 가게 앞을 지나다 보면 소주 한 병과 컵라면 하나만 넣은 검은 봉지를 들고 잰걸음(이라고 하기에도 보폭은 짧지만 속도는 매우 느린 걸음)으로 가시는 할아버지들을 많이 본다. 어디가 최종 목적지인지 따라가 본 적은 없지만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기 힘든 집일 거라는 오만한 상상을 한다. 거리엔 리어카에 자전거에 유모차에 박스를 쌓는 노인들, 나는 노인들에게 유독 크고 깊은 그래서 더욱 스스로의 위선에 실망을 하고마는 동정심을 느낀다. 아마 정서적으로 가까운 외할머니와 친할아버지가 계셔서 그런 듯 하다. 할머니는 교사 생활을 오래 하셨고 할아버지는 참전 용사로 국가유공자이셔서..두 분 다 연금을 받으신다. 연금이 없거나 한 달 생활을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을 받는 이들의 곤궁함에 마음이 아프지만 연탄 한 장, 도시락 하나 내 손으로 가져다 드린 적 없으면서 이런 마음을 습관적으로 가지는 나의 태도에 구역질이 나기도 한다. 몇 달 전에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앞으로 무언가는 해 봐야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끝냈을텐데.. 나는 몇 달 간 행동으로 한 것이 없다. 공부를 하겠다고 해 놓고 공부를 하지 않거나 살을 빼겠다고 해놓고 살을 빼지 않거나 게임을 줄이겠다고 해놓고 더 많이 하거나 했을 때는 자괴감이 들었지만 누군가를 돕겠다고 해 놓고 돕지 않은 나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다. 결국 말뿐이었고 허세였으며 그 것이 위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3
#1의 일기는 무려 작년의 일기이다. 2017년 6월 24일에 내가 페이스북에 기록했던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다이어트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나는 그 날 이후로 할머니를 2번 더 뵈었고 그 뒤로 같은 길에서 뵙지 못 했다. 수 십 번 했던 후회는 '집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 둘 걸..' 이었다. 내 딴에는 그 것이 실례일까봐 집에 가시는 길이 내가 가려는 길과 같아도 절대 뒤따르지 않았던 것인데..
어쩌면 몇 달 동안 집을 비웠다던 아들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며느리는 안 해주던 밥을 다시 해주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친구 집에 밥을 얻어 먹으러 오지 않아도 됐을테지. 또는 친구가 이제 밥을 같이 먹어줄 수 없는 상황이 됐는지 모른다. 2번을 더 뵈었을 때도 친구가 집에 없다고 하셔서 나는 할머니가 이 집에 드나드는 일이 썩 수월한 상황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단순히 나에게 뭔가를 얻어 가시는 일이 불편하셨을까? 나는 그 분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내 것을 받을 수 있게 해드리지 못 했는 것 같다. 돈뭉치라도 쥐어 드렸으면 내 마음이 편했을까? 나는 늘 비슷한 것들을 사서 드렸다. 5개들이 라면, 상자에 든 과자 1개, 우유 1개, 물 1개, 구운 계란 3개, 바나나 한 묶음, 편의점에 있는 옥수수.. 내가 혼자 편의점을 가면 물 빼고는 별로 살 일이 없는 물건들이다. 날씨가 많이 추워지면서 그 길을 자연스레 잊었다가 장미가 피고 지니까 그 할머니가 다시 생각났다. 이제 보니 오늘이 6월 27일이고 딱 1년이 지났구나. 오늘은 그 길을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