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제부터인가 '타인에 대한 호의'는 일상적이기보다 이색적인 것이 되었다.
(서로 신상을 전혀 모르고 안면만 있는) 이웃 간에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오지랖이 심하게 넓지 않으시다면) 택시 기사 아저씨의 이야기에 호응도 좀 해주고
(시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이에게 (운전자 입장에서) 먼저 가라는 눈짓도 좀 주고
위의 행동들은 누군가가 매일 실천하는 것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필요한 과잉 친절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들이다. (꼭 하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받는 입장에서도 호의라고 꼭 고맙거나 필요할 이유는 없다.) 엉뚱해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자연스러운 호의가 특별한 대접을 받게 된 원인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강박에 있는 것 같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삶 정도가 보편적인 도덕의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충분한 것.' 호의를 베푸는 일은 필요 이상의 행위인 것이다.
#2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명제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도 남에게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감각은 호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을 이유가 없고 나 역시 베풀 명분이 없다. 내 영역과 너의 영역은 아주 분명해지고 흔한 상황은 아니겠지만 너가 먼저 인사를 하지 않는데, 내가 먼저 인사를 하는 일조차 '호의를 베푸는' 행위로 여겨질수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가정이 낯선 이들은 나의 단정 대상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인사 나눌 생각이 없는데 상대방이 인사를 한 상황을 부담스러워 하기도 한다. '나는 인사 같은 거 하기도 싫고 받기도 싫은데..' 사람에 따라서 이 순간이 불편할 수도 있다.
#3
나는 모든 이가 타인에 대한 양보심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호의'를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자는 주장도 아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의식이 분명히 '선(善)'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출발한 것 같지만 이 것이 간혹 '나 역시도 누구에게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로 발전하고, '호의든 피해든 자연스럽게 주고 받을 대상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도달하면 인간들의 관계에서 최초의 명제('누구에게도 피해를 주면 안 된다')가 개인화를 더 심화 시키는 촉매역할을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 명제가 야기하는 결과가 늘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가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나는 각 개인이 타자에게 보이는 무색무취의 의식과 태도에 긍정하는 입장이 아님을 밝힌다. 꼭 얽히고 설켜야 옳은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예전에 여러 글에서 밝혔듯이 서로에 대한 관심이 화합과 상생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4
나는 남에게 내가 피해를 좀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나도 손해를 볼 수 있다. 아래층 아저씨가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땀 냄새를 풍긴다고 인상쓰지 않는다. 어느 날 혼자 들기에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이가 그 사람일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급하지 않다면사실은 웬만큼 급한 것까지는 내가 여섯 걸음 가는 동안 한 걸음 걸으시는 할머니를 열림 버튼 누르고 기다려 드린다. 언젠가 나만의 사정으로 눈물 흘릴 때 내 등을 두드려 주실 분이 그 할머니 이실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서로 간 경계의 날카로움을 조금 무디게 만들어보면 어떨까. 내가 그은 선 밖의 사람과 교류하는 일도 나쁘지 않다. 스팀잇에서 보지 않는가? 완전한 타인이 지인이 되어가고 서로의 교류가 유의미해지는 과정을..'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호구가 된다’가 아니고 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된다. 나는 우리의 삶이 나만의 삶보다 온도가 높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