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 자본주의를 읽다 1
고창남
판은 이미 짜여 있다
잘린 나무 위, 그려진 선 위에 돌이 놓인다
흑과 백
위도와 경도 사이, 지구별 어느 곳에서나
돌은 놓이고 선 위에서 살고 선 위에서 죽는다
선은 길이 되고 집이 되고 세계는 단순하다
내가 달리면 너도 달리고
한 칸 뛰면 한 칸으로 붙이면 젖혀온다.
판 위에 놓인 돌들이 현재의 나를 다 말해주지 않는다
돌은 언제나 일회성으로 놓이고
어긋난 해석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나는 매일 왜곡되고 이따금 정정된다
실력보다 운이라는 모든 정보는 공개되고
회수되지 못하는 돌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놓인 돌들은 탄력을 받는다
핵심은 중앙의 발견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단 한 번뿐이지
달콤한 손길이 기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침묵하고 있는 돌들의 언어를 찾아야 해
몇 마디 던지고 가는 초시계의 무심한 뒷모습
말 없음의 판 위에서
고요에 응전하다 얻은 생각
백과 흑
저 끝없는 규칙 앞에 놓인 돌들은
무한한 자유일까 고립일까
무모한 사랑을 확인하듯 서로를 감싸고 있다
마음이 세상 어떤 선보다 깊어지는 시간
놓인 돌들은 평등하지만
동그랗게 움츠린 돌들은 말없이 허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