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봉 어머니의 떡썰기와 베인 흉터치료
한호(韓濩, 1543년~1605년)는 조선의 문신·서예가이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붓글씨를 익혔으며, 타고난 천재에다 피나는 수련을 쌓았으므로 해·행·진·초(楷行眞草)의 각체가 모두 묘경에 이르렀다. 그는 돈이 없어서 서당을 다니기는커녕 먹과 종이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아리나 돌 위에 손에 물을 찍어서 글씨 연습을 하였으며, 매일같이 꾸준히 연습을 하자 글씨를 쓰는 솜씨가 차츰 나아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이에 그 어머니는 한호를 유명한 절로 들여보내 공부를 하게 하였는데, 한호의 스승인 승려는 한호를 가르치면서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늘어가는 그의 글 솜씨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한 지 4년 후, 어느 날 한호는 어머니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밤에 몰래 절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찾아왔다. 돌아와서 이미 공부를 많이 해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하자 어머니는 한호를 불을 끈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자신은 칼로 떡을 썰고 한호는 글씨를 붓으로 쓰게 하여 둘의 솜씨를 비교해 보자고 하였다.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크기나 두께가 모두 똑같아 보기가 좋았는데, 한호가 쓴 글씨는 서로 크기가 제각각이고 모양이 비뚤비뚤하여 보기가 흉했다. 이에 어머니는 한호를 크게 꾸짖으며 자신의 떡처럼 눈을 감고도 글씨를 고르게 쓸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집에 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엄명을 하여 한호를 다시 돌려보내 공부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 내려져 오고 있다.
한호는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혔으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뛰어난 평필가들의 필법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 등에 모두 뛰어나게 되었다. 석봉 서체의 특징은 그가 조송설(趙松雪)체를 쓰면서도 자기 독특한 체풍(體風)을 세운 데 있다. 그렇게 한호는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여 석봉류의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만들어냈다.
엄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은 〈필담(筆談)〉에서 석봉의 글씨를 가리켜 “성난 사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라고 했으며, 명나라 한림 주지번(朱之番)은 “석봉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안진경(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라고 하였다.
선조도 그의 대자(大字)를 보고 “기(奇)하고 장(壯))하기 한량없는 글씨”라고 찬탄하면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집에 연회를 베풀었다. 이어 선조는 한벽(閑僻)한 고을 군수에 임명하면서 “필법을 후세에 전하게 하고자 하니 권태로울 때는 구태여 쓰지 마라. 게을리도 말고 서둘지도 마라.”라고 타일렀으며, 선조 친필로 〈醉裡乾坤 筆奪造化(취리건곤 필탈조화)〉의 8자를 써 주었다.
그는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조선 초기의 4대 서가(四大書家)로 꼽힌다. 또한 한호의 글씨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친필 진본이 거의 없으나 석봉서법이라든가 석봉천자문과 같은 책이 모간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그의 흔적들 더듬어 보게 한다. 그러나 그의 글씨로 비문이 많이 남아 있어 탁본으로 유행하고 있다.
작시(作詩)에 능한 차천로, 작문에 능한 최립과 함께 송도삼절로 불린다.
한석봉과 어머니가 글쓰기와 떡썰기 시합을 했다.
그런데 한석봉이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그때 어머니가 한마디 했다.
"써! 얼렁!"
썰렁한 개그이다.
우유가 넘어지면?
..............아야...
우유를 우측으로 90도 각도로 보면 ‘아야’란 글자가 나온다.
서양의 속담중에 Don't Cry Over Spilled Milk란 엎어진 우유를 가지고 울지 말라 즉 후회하긴 늦었다 한국 속담으로는 엎질러진 물이란 뜻이 있다.
칼로 떡을 썰거나 요리를 하거나 해서 베인 상처가 나중에 흉터가 되는 경우가 있다. 베인 흉터는 칼자국이 나서 보기 더욱 흉악한데 엎질러진 우유에 울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듯 흉터치료를 하면 된다.
www.imagediet.co.kr 자향미한의원에서는 조리도중 칼로 썰거나 해서 베인 흉터를 흉터침으로 치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