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도시에 어둠이 차올랐다.
제법 늦은 시간이지만 도심 곳곳에 조명이 밝아 어둠의 농도는 짙지 않다.
어둠에 지지 않겠다는 도시의 근성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문득, 어둠이 액체 같이 느껴진다.
검고 끈적한 액체가 온 하늘을 뒤덮은 것만 같다.
하지만 여기는 안전하다.
실내의 조명이 창문 밖의 어둠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고 있다.
정전이라도 일어나면 어둠이 들이닥치겠지만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사실 ‘어둠이 차오른다’라는 표현은 지독한 비문이다.
어둠은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니 ‘있다 없다’라는 표현과 상응하지 못한다. 어둠이란 빛이 없음을 뜻하는 표현이니 말이다.
예를 들자면 ‘사과가 없다’는 말을 ‘사과가 없음이 있다’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어둠이 있다’는 말은 ‘빛이 없음이 있다’라는 괴상한 문장이 된다.
따라서 '어둠이 있다'가 아니라 ‘빛이 없다’가 맞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말장난을 벌여도 어둠을 허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엔 어둠이 유발하는 공포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지배적이다.
어둠은 존재한다.
내가 그것으로부터 두려움을 느끼니까.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 직장 사정으로 이사를 자주 다녔다.
그래서 늘 친구가 절실했고 또래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개구쟁이로 자랐던 것 같다.
작은 시골 마을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 동네엔 유모차에 아기 인형을 태워 같은 장소를 도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정신 지체자였지만 마을 사람들이 서로 가족처럼 돌봤고 그녀 역시 예의 바르게 행동해 전혀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엄연한 마을 구성원이었다.
그날은 수학여행 하루 전날이었다. 같이 어울리던 애들 중 대장급 아이가 그녀를 괴롭히자고 제안했다. 그 말에 내가 총대를 맸다. 아마 인기를 얻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흘렀다. 유모차에는 당시 티비 광고에 나오던 아기 인형이 뉘여 있었다. 눕히거나 앉히면 눈을 깜빡이고, 가끔 울음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리는 기능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인형을 집어 다리 밑으로 던졌다.
여자는 괴성을 지르며 다리 밑으로 뛰어내려갔고, 그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돌아왔다. 내 활약을 보며 아이들은 저마다의 감상을 말했는데 특히 일을 마친 후 당황하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줬던 것 같다.
그렇게 손에 얻은 인기는 다음날 수학여행까지 이어졌고 덕분에 나는 즐거운 추억을 잔뜩 쌓을 수 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다시 다른 동네로 이사했고 난 그 후로 다시는 그 여자를 볼 수 없었다.
그후로 정말 긴 시간이 흘렀다.
따라서 지금부터 하는 말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 추억이 워낙 뒤죽박죽인 탓에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조차 확실치 않다.
그 여자는 바로 그 다음날 경찰에게 연행당했다. 그녀는 시퍼런 식칼을 들고 같은 자리에 나타나 무서운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근처 가게 주인의 신고도 빨랐고 경찰의 충돌도 신속해 아무런 사고 없이 잘 정리되었다.
경찰에게 연행당하면서도 그녀는 반항 한 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누군가를 찾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말은 출처가 분명치 않다. 누가 나에게 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동네에 도는 헛소문이었는지 모르고 어디서 본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를 내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한참 전 일이라 그 당시 친구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확인할 방법조차 없다.
사실 내 마음을 괴롭히는 불확실성은 그보다 정도가 더 심하다. 나는 내가 정말로 그녀의 인형을 집어 던졌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불안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당시 일에 관해 여쭤봤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였다. 아버지의 대답에 한동안 마음을 놓았던 적도 있지만 아들을 걱정해 아버지가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다는 불안감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이 기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허무맹랑한 불안감 덩어리인지 알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몇 번이나 기억을 되뇌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 노력은 악으로 작용해 실제 기억과 상상의 경계를 지웠고 지금은 어디서부터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감히 손도 대지 못할 지경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수백, 수천번이나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지를 되뇌였다. 자신의 아이를 집어던지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 아이를 보며 그녀가 느꼈을 슬픔과 분노, 절망, 공포, 증오...
그 감정들은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내 세계를 잠식해갔다.
끝내 나는 이 모든 기억이 허상이라고 단정지었다.
나는 그녀의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 절대 불가능하다. 난 개구쟁이였지만 그 정도로 못된 짓을 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내 평소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사실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 다짐과 별개로, 이미 발현된 공포는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무의식은 꿈을 통해 시퍼런 칼을 들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그녀의 모습을 재연한다. 그녀는 아이를 죽인 나를 찾아 수년 간 거리를 헤매이고, 끝내 날 발견한다.
그녀는 날 죽이지 않는다. 대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내 눈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그 공포는 나에게 너무나도 실제적이다. 뇌가 그 감정을 끄집어내면 나는 뱃속 깊은 곳에서 들끓는 강렬한 소름을 정면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공포가 실재하면, 그날의 기억 역시 실제인 것인가? 사실 확인 여부를 떠나 실제 사건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애시당초 그녀의 유모차에 뉘여 있던 건 실제 아기가 아니었다. 아기 형상을 한 조악한 싸구려 인형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의 살의는 또 뭐란 말인가? 그녀의 모성애가 실제라면 그녀의 인형 역시 살붙이 진짜 아이여아 한단 말인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실체와 허상을 정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