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 기다림의 연속이다. 날 밝기를 기다리고, 공항에서 발권을 기다리고, 줄을 서서 보안검색대를 기다리고, 다시 비행기에 오르기를 기다리고, 이제 도착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때로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또 떄로는 설레게도 한다.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느냐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흔히 그 기약의 밀당이 이 모든 것의 기분을 좌우하곤 한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길어질 경우,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막연함 때문에 힘겨운 것이 되어버리고, 반면에 약속을 정해놓고 좋은 것을 기다리는 마음은, 그 최종 순간까지 사람을 마냥 들뜨게 한다. 가슴이 콩딱거리는 지금 내 마음처럼…
3년전,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 품을 떠나 미국으로 갔을 때,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바보였을까? 어쩌면 그냥 모르는 척 했던 것일지도) 기다림을 마주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 누구보다도 다정한 아이였기에, 그리고 늘 엄마를 원하던 아이였기에, 나는 이 느낌이 너무나 생소했다. 아이가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바쁘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머리와 분리된 가슴은 너무나 쉽게 지쳐갔다. 엄마의 우선순위는 몇 번째일까?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저 믿거니 하는 것이었는데… 시험에 밀리고, 과제에 밀리고, 친구들과의 식사약속, 스윙클럽, 리딩클럽, 짧은 여행 그리고 잠…. 아이와 연락이 끊긴 것은 아니었지만, 24시간 붙어있던 엄마는 늘 결핍을 느꼈던 것 같다. 아이가 모든 것을 겪고 누리기를 원했기 때문에 보챌 수도 없었다. 난 너에게 우주가 되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기다림이 너무나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쟈뷰 느낌. 도대체 언제 그럴 새가 있었지? 아이는 늘 엄마를 원하고 붙어있었는데? 그러고는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기다림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것은 내 모습이 아니었다! 눈 앞에 펼쳐진 영상의 주인공은 어린 딸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아이를 수시로 기다리게 했었다.
설거지 하고 해줄게, 아줌마랑 통화 하고 해줄게, 이거 꿰매던 것 마저 하고 해줄게. 오늘은 바쁘니까 다음 주에 가자….
아이는 손에 장난감을 들고, 인형을 들고, 책을 들고 그렇게 수도 없이 기다렸다. 물론, 부득이한 일도 있었지만 흔히 그렇게 급하지도 않은,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밀려서…. 이것을 인지한 그 날 참 많이 울었다.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묵묵히 기다리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리고 어른인 나도 이렇게 힘든 기다림을 아이에게 반복해서 줬던 것이 어찌나 미안하던지…
누가 누구를 인내하는가? 우리는 자식을 키우며 정말 많이 참고, 인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 역시 얼마나 우리의 행동을 참고 인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아이들에게 있어서 부모는 생존권을 쥐고 있는 존재이기 떄문에, 끊임없이 인정 받고 싶어하고, 잘 보이고 싶어한다. 아이들이 떼를 쓰는 이유도 어필하고 싶기 때문인 것이지 미움 받으려고 하는 행동은 당연히 아니다. 물론 아이들은 기다림도 배워야한다. 세상 모든 것에는 기다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도 똑같이 우선순위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상처받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지워지기도 쉽지 않다.
아무튼 난 그날 이후로 아이를 기꺼이 기다리기로 했다. 아이가 기다리던 차례가 끝나고 부모가 기다리는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인형을 들고 엄마 옆에 앉아서 엄마의 바느질이 끝나길 기다리던 아이처럼 나도 평화롭게 내 일을 하면서 아이가 고개 돌려 나를 봐주길 기다린다. 그리고 딸이 그리워지는 순간에 아이를 찾는 대신,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계실 어머니께 전화를 건다. 그러면 애들처럼 좋아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딱 내가 그렇게 딸의 전화를 반기듯이.
이제 착륙이 세시간 남았다. 난 여기서 딸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딸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한 번씩 시계를 확인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