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남자친구와 걷는 것을 봤어. 너의 표정은 밝았고 즐거워 보였어. 네 남자친구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어. 내 후배기도 하고. 객관적으로 잘생기고, 사려깊고, 친절한 사람이였지. 나는 멈춰서서 너의 표정을 훔쳐 보았어.
좋아 보였어.
어제 꿈에 네가 나왔었어. 모래사장이 있었고, 그리고 네가 나왔었어. 가만히 서서 나를 보고 있었지. 꿈을 생각하며 멀리서 너희 둘을 봤어. 너흰 게시판 앞에서 사이좋게 손을 잡고 웃고 있었지.
그래. 좋아 보였어.
너의 남자친구는 내게 정중하게 인사했어. 넌 남친이 안 볼때 살짝 손을 흔들어 줬지. 내가 이방인처럼 느껴져 간단한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어.
갈 길을 가면서 생각했어.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내겐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닿지 않을 만큼 멀리, 평생 볼 일 없을 달의 뒷면처럼.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든, 내가 호의를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말야.
그렇지만 넌 좀 달랐어.
이년 전, 널 처음 봤을 때. 나는 네 이름을 몰랐지만 너는 내 이름을 알았지. 내가 너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자 '너무해요!'라고 외치며 두 눈을 질끈 감던 널 아직도 기억해.
넌 나에게 산소를 줬어. 사랑은 공기와도 같다고 기욤 뮈소가 썼는데, '구해줘' 였던가? 걔 소설은 다 비슷비슷해서 한 권을 읽든 여러 권을 읽든 다 비슷하게 느껴지더라. 어찌됐든, 어두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내게 자신의 산소탱크를 물려주듯 말했지.
'저 xxx에요!'라고 또박또박 알려줬어.
넌 그 이름이 내 꿈 속에, 잠들지 못하는 새벽 두 시에, 한낮에 혼자 밥을 먹던 내 옆자리에 끼어들었다는 걸 모르겠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길고 긴 밤동안 내게 이름을 알려주던 너의 목소리가 나를 지나쳤어.
친해지고 싶었어. 하지만 우리는 그저 과 후배와 선배 사이었고 연락을 먼저 하기엔 나는 너무나 멍청했지. 내게는 너무 어려웠던 문제였어.
내가 예전 아는 형의 연애 상담을 해줬던 적이 있었어. 그 형은 내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고, 어떻게 해야 할까 내게 물었어.
'그냥 같이 밥 먹자고 해!'. 간단한 조언과 '그런다고 세상이 무너져?' 란 물음을 동봉해 답을 했지. 그런데 형은 내게 진지하게 대답했어.
응, 세상이 무너져.
나는 그 말을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난 꽤나 웃기고 쾌활하고,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 하지만 실제론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고,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지만 생각하지.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난 알아.그래서 네가 나한테 친절했을 때 난 무서웠어. 너는 아무 것도 모르고 내게 친절했지. 주변에 알려진 모습과 페이스북에서의 모습을 본 걸까?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냥 넌 내게 친절했던 걸까? 왜 그렇게 밝게 인사해줬던 걸까?
넌 내 진짜 모습을 모르잖아. 동굴 속의 괴물처럼 어둡고 달 뒷면처럼 울퉁불퉁한 날 모르잖아.
이런 생각을 자꾸 하다 보면 난 무서워져. 사람들이 내 우울함을, 어두움을 알게 되면 날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돼. 그래서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를 버리기 전에 먼저 도망쳐 버려. 멀리, 멀리.
이번엔 도망치고 싶지 않았었어. 하지만 다가갈 용기도 없었지. 그래서 달처럼 네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만 했어. 그러다가, 결국은.
네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 날 나는 새벽 내내 울었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변만 빙빙 돌던 나와 그런 나를 만든 내 옛날과 한심한 지금 모습 모두 다 싫었어.
차라리 네가 나에게 인사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너는 지금도 나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주지. 네가 알바하는 곳에 자주 찾아가고 싶어지게 해.
그러지 마. 결국 난 다시 물 속으로, 어두운 우주 속으로 돌아가야 해. 거기가 내 집이고 내가 평생 살던 곳이니까.
있잖아, 심해어는 말야. 물 위로 올라오면 부레가 터져. 깊은 곳에 사는 심해어를 급작스럽게 물 밖으로 꺼내면 말야. 심해어를 누르고 있던 수압이 급격히 약해지면서, 부레 안의 공기가 팽창해. 결국은 갈기갈기 찢어져 죽어버리고 말지.
그러니까 심해어는 그냥 물 깊은 곳에 살게 해야 해.
네가 내게 인사를 하면 말야. 공기를 건네주면 말야, 나는 순식간에 물 밖으로 쏘아져 나와. 그 날은 내 부레가 하루 종일 아프지. 내가 일하는 가게에 와서, 남자친구의 등을 바라보는 너의 눈빛이 말야, 나에게 한번도 보여주지 않던 눈빛이 너무나 아파. 가게를 나가며 내게 인사하는 게 너무나 아파.
그러니까 말야. 이제 나를 좀 모른 척 해줘.
안녕. 이젠 잠수할 시간이야.
이러고도 또 마주쳐 버렸지. 여전히 밝게 인사해 주더군. 이제는 심해어는 아니고 고등어 정도로 버틸 수 있게 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