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리쿠르고스 (3)
똑같이 불법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시켰고,
그와 반대로 리쿠르고스는 의회 역할을 담당할 원로원을 창설했다.
정권을 다시 잡은 리쿠르고스는 여러 가지 혁신적 제도를 도입했다. 단연 중요한 개혁 조치는 원로원을 설치한 다음 이곳에 중요한 국가적 문제에 관해서 왕들과 동일한 표결권을 준 일이었다. 플라톤은 스파르타에 원로원이 생김으로써 왕들의 변덕과 자의를 견제하고, 일관되고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종전에는 정치체제가 참주정과 민주정 사이를 수시로 오락가락하곤 했었다. 원로원은 국가라는 배가 안정된 항해를 할 수 있게끔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평형수 역할을 수행했다.
원로원 의원의 총수는 28명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쿠르고스와 거사를 끝까지 함께한 혁명동지들의 숫자가 28명이었고, 이들이 모두 원로원 의원이 됐기 때문이었다고 그 연유를 설명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공동 국왕 두 명이 합쳐져 서른 명을 만들기 위해 원로원의 정원이 28명으로 정해졌다는 분석을 조심스럽게 내놨다.
리쿠르고스는 그가 확립하려는 지배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델포이에서 또다시 신탁을 받아왔다. 그가 받아온 신탁에는 ‘레트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레트라의 뜻에 따라 민중을 ‘씨족집단’과 ‘형제들의 모임’ 둘로 나눴다. 그는 바뷔카(다리)와 크나키온(강) 사이의 넓은 공간으로 민중을 소집했다. 휑한 공터에서 회의를 열면 여느 회의장마다 모두 있기 마련인 화려한 조각상과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천장 따위에 한눈을 팔지 않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회의에 참석한 군중에게는 법안과 의제를 발의할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왕이나 원로원이 제안한 안건을 거부할 권리는 있었다. 발의된 의제와 안건의 의미를 수정하거나 변경시킬 수 있는 권능을 나중에 민중이 확보하게 되자 플뤼도로스와 테오폼포스 왕은 “인민이 왜곡된 발의를 채택하면 원로원과 왕들은 휴회를 선언할 권리를 갖는다”는 조항을 레트라에 추가로 삽입시켰다. 즉 민중이 표결해 통과시킨 결정을 국익에 해로운 내용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깡그리 묵살하고서, 왕이나 원로원이 회의를 임의로 중간에 해산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이러한 독단적 행위를 신의 뜻이라고 강변함으로써 민중의 반발을 억제시켰다.
리쿠르고스가 나라의 체제를 이처럼 혹독하게 담금질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두제의 흔적은 여전히 살아남아 세월의 흐름과 비례해 더욱더 크고 짙어졌다. 스파르타는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고자 리쿠르고스가 세상을 떠난 지 130여 년이 흐른 뒤인 테오폼포스 왕 때에 이르러 에포로스 제도를 새로이 도입했다. 에포로스는 스파르타의 최고 행정관으로서 모두 5명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2명의 왕과 나란히 행정부를 이끌었다.
에포로스는 일견 왕권을 약화시키는 존재로 여겨진 터라 왕비가 아들의 대에 이르러서는 왕의 권력이 예전만 못하리라고 걱정하자 테오폼포스는 “아니, 강화될 것이오. 왜냐면 왕조가 더 오래갈 것이기 때문이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랬다. 왕들이 과도한 권리를 자진해 포기함으로써 왕에 대한 시기와 증오 역시 그만큼 줄어든 까닭에서였다. 이와는 달리 민중에게 어떠한 양보도 하려고 들지 않은 멧세니아와 아르고스의 왕들은 끝없는 반란과 저항에 부딪쳐 비참한 운명을 맞이해야 했다. 두 나라 모두 출발 단계에서는 영토에서나, 인구에서나 스파르타와 비교해 나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시계를 리쿠르고스 시대로 다시 되돌려보자. 정치개혁보다 더 중대한 일은 경제개혁이었고, 경제개혁의 고갱이는 토지개혁, 즉 농경지의 재분배였다. 토지의 편중은 부의 편중으로 이어졌고, 부의 편중은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수많은 도시빈민을 낳았기 때문이다. 리쿠르고스는 극심한 빈부 격차가 사회에 오만과 시기를 만연시키고, 사치와 범죄를 양산하는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모두가 가진 땅을 하나의 덩어리로 일단 크게 합쳤다가, 모두에게 같은 크기로 나눠주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각자가 보유한 생산수단의 가치와 규모를 동등하게 만들어놓으면 사람들이 재산 대신 명성을 추구할 것이라고 리쿠르고스는 생각했다.
그는 주장을 실천에 옮겨 라코니케 지방의 땅을 3만 조각으로 나눈 다음 비슷한 숫자의 자유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했다. 스파르타에 속한 토지는 9천 개의 부지로 분할해 같은 수의 스파르타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새롭게 땅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4만 명 가까이 생겨났고, 이들은 전시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싸움에 임할 것이 분명했다.
획일적 토지 분배로 말미암아 토지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양이 줄어듦으로써 남편에게는 70메딤노스, 아내에게는 12메딤노스가 돌아갈 정도였다. 포도주와 기름의 생산량 역시 감소했다. 리쿠르고스는 이 정도 양이면 신체의 활력을 보장하고 생명을 건강히 유지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는 추수가 끝난 밭들에 쌓인 곡식 더미의 크기가 어느 마을을 가도 비슷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라코니케 전체가 마치 여려 형제가 나눠가진 문중 소유의 땅 같습니다”라며 뿌듯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 1메딤노스는 약 53리터, 즉 53kg 정도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