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모든 행동은 인정하고 싶든, 그렇지않든 간에 상관없이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어릴 때는 그저 말 잘 듣는 아이였다.
조용하고 그저 잘 웃는 아이. 무난한 아이.
그렇기 때문에 세상사 아주 나쁜 것들은 교묘히 피할 수 밖에 없었던,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제껏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내 나름의 소심한 방법으로 나를 지키며 잘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소심한 방법으로 나를 지키며 산 결과, 아주 운이 좋아 나름의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이렇게 팔자 좋은 소리나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의 그 소심한 성격이 나의 오늘을 만들어주었는지도.
나의 무의식.
그렇게 말 잘 듣던 아이가. 그렇게 무난하던 아이가. 뒤늦게 철이 들어야 할 나이가 되어서 갑자기 뒤늦은 반항을 하고 해야할 의무는 다 거부하고 마치 세상에서 일부러 미움을 받기로 작정한 사람같이 행동하고.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최대한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인냥 행동하고 앉아있다. 마치 내가 이렇게 했을 때도 내가 그래도 사랑받을 수 있는지 시험하려는 것처럼.
마치 아이가 엉엉 울고 떼쓰면서 그래도 엄마가 나를 안아주는지 확인하려는 철없는 동심처럼. 그래서 안아주지 않는 엄마를 보며 소리없이 절망하고 체념하지만 그럼에도 다시금 나를 안아주지 않을까 다시 떼써보고 싶은 아이의 마음 말이다.
뭐, 그러니 결국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이다.
철이 들어야 할 나이에, 누군가를 이제는 내가 가슴으로 품고 사랑해줘야 할 나이에, 뒤늦게 사랑 받으려 하는 것이다.
어릴 적에 충족되지 못했던 그것을 모공이 넓어져 가고 눈꼬리가 쳐져 가고 뱃살이 늘어져 가는, 마땅히 성숙해져야 할 이 나이가 되어서야 발악을 하고 사랑 받으려 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떼를 쓰는 것이다 .
나를, 내 존재로서 사랑해달라고.
그저 따뜻하게 안아달라고.
그렇지만 떼 쓰는 아이가 한없이 짜증나고 싫다가도 그래도 내가 뭐라고 내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를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을 갈구하는, 내 존재로써 사랑받길 간절히 바라는 내 자신을 참 한심하다고, 너 참 짜증난다고 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찌보면 이 세상의 인정이 뭐라고, 그것을 이토록 갈구하는 내 자신이기에 더 미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떼써도 결국은 용서가 되는데 다 큰 어른이, 경로석에 앉은 노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쓰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
우리는 그저 우리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른의 나이가 되었다고 우리에게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삶의 기준을 들이대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은 겉으론 노인네지만 속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기고 싶은 어린아이인데.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허용이 안되니 괜한 잔소리, 참견, 온갖 오지랍 등 남이 싫어할만한 행동만 골라서 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안아주길 바라며 떼쓰는 아이처럼 말이다.
세상을 겉으로 보이는 그대로만 보지말고 한번쯤은 현상에 가려진 그 이면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보는 시간도 필요할듯 싶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