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가끔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정하려면 그의 두려움을 건드려야 한다.
역으로 타인이 나를 마음대로 조정하려면 그가 나의 두려움에 대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인간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지라 타인에 대해 배척 당하는 두려움이 큰 것 같다.
우리가 웃기 싫어도 올라가지 않는 떨리는 입꼬리를 잡아 당기고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아도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게 되는 것이 바로 배척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둘째 임신 후 시어머니께서 첫째 아이를 일년동안 봐주셨는데 아이를 본인이 원하는대로 변화시키기 위해 가장 자주 쓰시는 방법이
“너 그러면 할머니 너 싫어할거야.” “너 이러면 누가 너를 좋아하겠니?” 하시며 배척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시는 것이다.
끊임없이 이러한 가치관을 주입당한 아이는 점점 배척 당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고 마침내 무리(강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맞춰 나간다. 그래야 배척 당하지 않으니까. 그래야 두려운 일을 당하지 않을테니까.
배척 당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테지만 원하든 원치않든 조금 달라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무리의 배척은 자행되고 희생양들은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희생양이 되었던 것은 안타깝고 다시 돌아간다면 희생양이 되지 않고 싶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래도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고통, 외로움을 겪지 않아본 사람들을 그것을 영원히 겪지 않기 위해(사람들이 그것은 호환마마처럼 너무 무서운 거라고 했으니까)계속해서 자신을 억누르며 무리에 억지로 자신을 껴맞추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실제로 겪어본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더 커지지만 점점 더 심한, 너무나 괴로운 마음의 고통의 경지까지 가본 사람은 이상하게도 이제 그 두려움에 대해 좋게 말하면 초월하는 태도, 나쁘게 말하면 포기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그래서 결국 여러 영적 지도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으로 언급하는 “내려놓음”의 경지를 원하든 원치않든 겪게 된다.
내려놓지 않으면, 초월하지 않으면 너무나 괴롭기 때문이다. 극심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그토록 놓지 않았던, 두려움을 겪지 않기 위해 해왔던 자아에 대한 집착, 타인에 대한 기대 등을 어쩔 수 없이 놓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진다.
나는 이미 겪어봤기에, 약간은 ‘그것보다 더 하겠어’ 하는 똥배짱, 담력이 자신도 모르게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생존의 본능이 있기에 자신이 정말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겪으면 그때 그 고통에서 나를 구해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게”된다. 그럼으로써 그토록 무서운줄 알았던(무서운거라고 주입 되었던) 두려움이 사실은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강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타인을 조정하기 위해 그들의 두려움을 이용한다. 그래서 결국은 말 잘 듣는 사회를 만든다. 그래야 본인이 편하니까.
마라톤을 하다보면 처음엔 죽을 것 같다가 나중엔 그 고통의 단계를 어떻게서든 넘어서면 ‘러닝하이 Running High’라는 환희의 단계가 찾아온다고 하는데 고통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살짝 살짝 고통을 맛본 사람은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져서 앞으로는 그 두려움을 겪지 않기 위해 더 말을 잘 듣게 되지만 끝까지 가본 사람은 결국은 내려놓음의 말도 안되는 체념하는 듯한 편안함의 경지에 다다른다.
이게 좋은 상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고통을 겪지 않아본 사람보다는 고통에 면역력이 생겨 두려움이 덜 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안돼봤자 그 정도겠지”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더라.” 이런 어떻게 보면 조금은 어이없는(?) 쿨한 태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고통스러운 사람들, 왜 나에게만 이러냐고 하늘을 맘껏 원망해도 좋지만(사실 세상은 불공평하기에 우리는 원망할 자격이 충분하다. 모두가 자신이 만든 결과라고들 말하지만 첫출발점이 달랐던건 사실이니까)
그러는 동시에 이 고통 끝에도 나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있다는 것을 단단히 마음 속에 새겨뒀으면 좋겠다.
우리는 두려움을 겪었음으로 이제 덜 두렵다. 우리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세상이 우리에게 그러한 겪지 않아도 됐을 고통의 경험을 준 것은 어쩌면 우릴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다.
첫출발점이 비록 서글펐더라도 최후에는 그들이 아닌 내가 웃을 거라는 것을 굳게 믿고 그 아픔을 발판 삼아 더 강해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고통만이 인간을 성숙시킨다>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