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는 참 욕 먹어도 싸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싸다기 보다는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가 싫을수도 있겠구나 정도이다. (쌀 정도는 아니길 바란다)
나는 그 전에는 잘 몰랐는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 하고 주위의 뜻에 맞춰서 산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존 때문일수도 아니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사랑 받고 싶은 욕구 때문일 수도 있다.
본래의 나를 내보이면 작게는 집단, 크게는 사회는 그것을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사회에는 어떠해야 한다는 아무도 입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암묵적인 룰이 있고 (모두가 같이 사이좋게 협력해야 한다든지) 그 룰에 맞추지 않으면 사회는 개인에게 압박을 가한다.
(회사 회식 때 사장님이 딱히 감동적이지 않은 목청으로 연속해서 노래를 부르실 때 우리는 암묵적으로 손을 흔들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상사와 같이 삼겹살을 구우면 뒤적거리고 싶지 않은 삼겹살을 뒤적거려야 하고 같이 술을 마시면 내가 따르고 싶지 않은 술도 타이밍에 맞춰서 따라야 한다.
이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암묵적으로 정해진 룰이고 그것에 따르지 않는 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려 마음이 불편해지게 된다..(그래서 나는 자주 마음이 불편해지곤 한다)
나는 내가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만 살지 못 하는 것에 대해서 나의 내성적인 성격을 탓했는데(특히 나의 내성적인 성격을 불러온 어릴 적 집안환경을) 살면서 보니 나는 정말 양반이었다. (양반.. 요즘에는 잘 안 쓰는 말..)
세상에는 나보다도 훨씬 더 자신을 억누르고 표현하지 못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나를 보고 “너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거야. ”라는 식으로 부러워하는 경우까지 있었다..(나는 알고보니 많이 표현하는 편이었던 것이다..!)
요즘에는 나도 내 능력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예전에는 심할 정도로 돈에 관념이 없었는데(지금도 그렇긴 하지만..심한 정도는 아니길 바란다) 요즘에는 나도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싶다는(갖춰야 한다는)생각을 한다.
그것은 옷을 사고 싶거나 (물론 옷도 사고 싶지만..옷장에 몇년 째 같은 옷만 있다) 가방을 사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이상의 나에 대한 침해를 벗어날 수 있는 기본적인 경제적인 자유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롤프 도벨리의 <불행을 피하는 기술>에서는 ‘퍽유(Fuck you)머니’란 개념에 대해서 나오는데 나를 모욕하는 상사의 면전에 퍽유(세번째 손가락^^)를 날리고 사표를 던지고 나올 수 있을만한 돈을 수중에 모아놔야 한다는 것이다.
강신주 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소중한 사람 앞에서는 반드시 가면을 벗어야 해요. 생존을 위해서 가면을 써야 하는 경우가 가장 슬픈 거예요.”
그렇다.
가장 슬프지만 생존을 위해서 가면을 쓰는 일은 용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자책할 일도 아니다. 우리는 태어난 이상 생존을 책임져야 하기에 생존을 위해서 가면을 쓰는 것에 대해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자신을 자책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문제는 생존이 이미 보장 되었는데도 계속 더 나은 생존(생활)을 위해 자신을 감추는 가면을 쓰고 내가 가면인지 가면이 나인지 모르게 될 정도까지 남들이 원하는 나로만 살아가는 것이다.
강신주 철학자의 말을 빌어 우리는 이제 최저 생활비가 아니라 자신의 최적 생활비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얼마큼 벌어야 더 이상 그 이상의 욕심으로 자신을 버리지 않고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적절한 자신만의 경제적 기준을 설정해 그 이상 욕심을 내어 자신이 아닌 생활을 계속해 나가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가면을 쓰고 더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이 나은지 이 정도로 만족하고 가면을 벗고 나로 생활하는 것이 나은지는 본인 선택의 문제이다. 누구도 이래라 저래라 어떻게 사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우리는 나를 표현하고 살아야 조금 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일거라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개성을 마음껏 표현할 때, 우리가 서로 똑같아짐을 강요받지 않을 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자의 매력을 발산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사회는 더 활기차고 더 발전해나갈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모두가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생각을 한다면 사실 우리가 이렇게 여러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딱히 찾을 수가 없다. 내가 너와 똑같은 생각을 해야 하고 너가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면 왜 굳이 나와 너가 둘 다 존재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축복이다.
그것은 우리의 발전의 원동력이며 삶의 활기이고 인간관계의 재미이다.
문제는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지 못 하고 ‘너는 나와 같아야 해’라고 강요하는 문화와 내가 너와 다르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몰래 자신을 감추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나는 희안한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불리는 그러한 많은 문학작품들을 살펴보면 그 안에 정상적인 인물들이 별로 없다. 다 좀 어딘가 특이하다. 이상한 사람들이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평소에는 정상인처럼 되기를 강요받으나 이상하게 이상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그 소위 말하는 고전이라는 책을 읽기를 강요 당한다.(이것마저 강요.. 청소년 필독서 등등으로)
나는 어딘가에도 끼지 못 하는 존재라고, 나는 누군가에게도 이해 받지 못 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마음 속 깊이 사무치는 외로움을 어쩌지 못 해 괴로워할 때 소위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을 펴보면 다행스럽게도 거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나와 같은 이상한 사람들이 널려(?)있다.
그 주인공들의 생각과 행동은 특이하며 우리가 평소 느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느껴지는 소위 금지된 욕망이나 생각 같은 것들이 아주 세세하고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걸 읽는 우리는 나에게 금지되어 있었던 느낌들을 그들이 대신 표현해주는 것을 느끼고 무언가 답답했던 마음이 혹은 그동안 느꼈던 내 느낌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들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낀다.
그럼으로 우리는 다시금 가면을 쓰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활력을 얻는다. 역설적으로 비정상임을 인정해야 다시 정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특이한 주인공들이 나오는 딱히 자기계발서처럼 어떤 교훈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 특이한 내용의 책들이 고전이라고 추앙받고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사라지지 않고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자기 계발서는 그 시대에만 인기를 끌 뿐 보통 세대를 걸쳐서 대대손손 내려오진 않는다)
내가 무리에 끼지 못 하고 배척되었던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40년 가까운 인생을 살면서(언제 이렇게 많이 살았는지..ㅜㅜ) 나는 중간중간 주기적으로 배척되어 왔고 또 다시금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했고 그것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을 숨길 줄 몰랐던 (그래서 내 자신을 보호하지도 못 했던) 어린 시절에 배척 당하고 괴롭힘을 당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도 역시 ‘너는 나와 달라’라는 느낌을 그들에게 은연 중에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조용한 성격이었고 그저 조용하게 가만히 있는 나를 어떤 몇몇은 이런 내가 불쾌했었나보다. 그들과 달라보이는 내가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너 바보냐(그 당시에는 바보가 가장 사람을 모욕하는 말이었을 것이다)’라며 나를 배척했던 것이다.
배척을 당한 나는 정말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 이상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또한 나의 본모습을 드러내면 배척 당하고 내가 피해를 본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기에 소위 머리가 커진 다음부터는 나도 다른 사람과 비슷한 척 하기 시작했다.
내가 관심이 없어도 그들이 관심있어 하는 주제에는 관심있는 척 했고 내가 딱히 재미가 없어도 그들이 웃고 있으면 나도 같이 웃었다. 그 후부터 나는 심하게 배척 당한 기억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보호하는 것은 이제는 인간관계에서 필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내가 정말 가까워지고 싶은 소중한 사람에게는 나의 가면을 벗고 내 진짜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말이다.
아무에게나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보이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세상에는 상처 받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감싸며 위로하려고도 하고 또 반대로 자신의 상처와 자신의 망가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어긋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깍아내리고 짓밟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너보다는 나은 사람이야 라는 우월의식을 느끼며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려 하는 것이다. 어긋난 방법이지만 이미 그렇게 해서 한번 쾌감을 맛본 사람은 그것이 어긋난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계속해서 그 방법으로 자신의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려 애쓴다.
또 한가지 유형은 자신이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채 자신의 상처를 남에게 전가하는 경우이다. 자신이 상처가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 하는 사람은 그들과 교류하는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는 상처를 받은 너가 이상한거라고 나는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다면 비록 나는 고의는 아니었지만 나의 상처를 그에게 나도 모르게 전가한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그와 교류하는 사람이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마음 속에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살짝만 건드려도 상처가 쓰라리기에 쉽게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몬다.(나도 예전에는 이런 유형이었다. 나는 선, 나 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은 악으로 보았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인간관계라고 하나 보다.
아무리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평탄한 가정에서 자라 행복만 맛보고 살았어도 세상에 나와 부딪히다 보면 상처 받은 사람들 투성이기에 그 상처가 나에게 전가되고 나에게 흡수된 상처를 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이건 아니야. 이제 사람을 만나지 않겠어.그럼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을거야’ 하고 혼자도 있어보지만 우리는 태생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 단지 혼자만 있어서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사람으로 상처를 받았지만 그 상처는 반드시 사람으로 치유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시가 나왔나 보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너무 멋진 시다.
정말 인생에 정답이 있다면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싶다.
법륜스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세상을 위해 가장 잘 하는 일이 바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 맞는 말씀이다.
우리는 살면서 어떠한 식으로든 상처를 받았다.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그 상처를 다른 이에게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불행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돌아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우선 나부터 행복해지고 보자.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