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여행 전 : 바람 많이 불고 흐림
나는 스팀잇에 꽤 자주 들어오고 글도 썼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6일전이라고 나온다.
정말이지 이번 한 주는 너무너무 바빴다.
설 연휴가 끝나고 시작하는 주였고, 다음주 3.1절 공휴일 전 주였다.
그래서인지 온갖 일들이 산더미처럼 밀려들었고,
난 평일동안 일을 해치우기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했다.
사실 내가 몰려드는 일을 하면서도 으쌰으쌰 힘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주말에 일본에 가서 초딩 동문모임을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_+
아 그렇다고해서 내가 일본서 초등학교를 나온 건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 잠깐 다녔는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친한 동문들끼리 1년에 한두번씩 모여서
각자의 나라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파티 겸 친목모임을 갖는다.
올해는 현재 일본 도쿄서 일하고 있는 동문이 아태지역 동문회장을 맡았기 때문에
일본의 옛 수도 교토에서 모이기로 했다.
만약 도쿄에서 모인다고 했으면 난 안 갔을 것 같다.
요새 나랑 동경이랑 권태기라서.
그렇지만 교토는… 아직까지 나에게 미지의 세계라고나 할까?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 본 여자라고 하던데,
내가 교토를 생각하는 느낌이랑 비슷한가보다.
이렇게 남자의 심리를 하나 배운다.
어쨌든 교토에 오랜만에 간다는 설렘 덕분에
끝낼수 없을 것 같던 양의 일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새벽에 끝냈다.
그리고 3시간 자고 허겁지겁 짐 챙겨서 공항으로 갔다.
#1. 여행의 시작 : 햇빛 짱짱, 바람 살랑살랑, 맑음.
여행의 첫 출발이 좋다.
업그레이드를 받았다!!!!!
공항에서 체크인하면서 엄마랑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잠을 얼마 못자서 비행기 안에서 잠 좀 보충해야겠다는 내용의 말을 했다.
그러자 갑자기 직원분이
”오늘 조금 더 편하게 가시라고 좌석을 옮겼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날 업그레이드 시켜 주셨다 +_+
직원분의 등 뒤로 갑자기 후광이 보였다.
내가 예약한 클래스는 원래 잘 업그레이드 안 해주는데…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
다음번에 체크인할때도 내가 피곤하단 걸 강하게 어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2. 교토 도착 : 여전히 맑음.
우리가 묵기로 한 호텔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랑 반갑게 인사하면서 각자 체크인을 했다.
내가 여권이랑 신용카드를 내니까, 직원이 내 방은 이미 선결제 되었다고 말한다.
동문회장이 내 방을 대신 결제했다는 말과 함께 룸 업그레이드를 해주었다고 한다.
지난 연말에 동문회장이 가족들이랑 서울에 놀러왔을 때 저녁을 대접한 일이 있는데,
그때 일이 고마워서 이번엔 자신이 대접하는 거라고 했다.
어후…..
몸 둘 바를 모르겠지만 난 쭈구리니까 감사히 받는다.
겸양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땡큐베리감사.
#3. 핸드폰님의 다이빙 : 먹구름 잔뜩 끼고 흐림.
난 너무 피곤해서 점심은 건너뛰고 방에서 쿨쿨 잔 후 꽃단장을 했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몇몇 사람들끼리 호텔 내 정원을 구경했다.
2년전에 호텔이 오픈하자마자 한번 가족여행으로 온 뒤로 처음 왔다.
오랜만에 본 정원과 연못은 여전히 이뻤다.
내 다리통만한 잉어들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연못에 있는 잉어를 본다고 쭈그리고 앉아있는데,
뒤에서 친구가 장난친다고 날 밀었다.
순간 중심을 잃으면서 손에 들고있던 핸드폰을 연못에 빠뜨렸다!!!!!!!!
핸드폰은 잉어들 사이로 빠지면서 연못 밑으로 가라앉았다.
난리가 났다.
다들 플래시 켜고 내 핸드폰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다고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위치를 찾는다한들 그걸 어떻게 꺼내겠는가.
교토는 우리나라만큼 춥진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물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누가 연못안으로 들어가서 핸드폰을 주워올까.
아무도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4. 백마탄 왕자님을 보는 느낌이 이런걸까? : 맑게 갬.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연못으로 들어갔다.
호텔 직원이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백마탄 왕자님이 나타날 때는
갑자기 화면이 천천히 흘러가면서 상큼발랄한 ost 가 나온다.
딱 그 상황이었다.
그 직원분이 망설임없이 연못 속으로 들어가서 뜰채로 내 핸드폰을 건져내는데..
내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갔다.
한 눈에 반할 것 같았다.
그 직원분이 남자였다면.^^
(안타깝게도) 그 직원분은 아리땁고 젊고 날씬하신 여성분이셨다.
이쁜 사람들이 착하다는 속설은 진리다.
참고로 나도 착하다. 진짜다.
#4. 핸드폰님의 사망선고 : 다시 흐려짐.
겨우 꺼낸 내 핸드폰님.
얼른 물기를 닦고 심폐소생술을 진행해본다.
아무리 전원을 켜도 반응이 없다.
누군가가 구글에 검색해보고는
물기가 완전히 마를때까지 며칠동안 기다렸다가 전원을 켜야 한다고 말한다.
물기가 있는 상황에서 전원을 켜면 아예 메인보드가 나간단다.
망했다.
사요나라, 내 핸드폰님.
그동안 함께해서 즐거웠어.
다음 생에는 나같이 칠칠치 못한 주인을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있는 기프티콘들은 나에게 전달하고 떠나지 않으련?
내가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모은 기프티콘들인데 ㅠㅠ
#5. 계속 더 흐려지다 못해 깜깜해짐.
핸드폰님의 장례식을 치뤄드리고 저녁먹으러 이동했다.
스시다.
오겡끼데스까- 스시?
안녕, 내 사랑.
오랜만에 너를 만나 매우 반갑구나.
하지만 나 혼자만의 반가움이었나보다.
스시님은 날 거부했다.
우린 오마카세로 먹었는데, 코스 초반부터 체한 느낌이 나더니 더는 못 먹겠다.
다른 사람들은 술이며 우니를 판 채로 퍼먹고 있는데,
나만 직원이 사다준 약을 먹고는 다른 사람들이 먹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아오 진짜.
너무 얄미웠다.
나도 마구마구 잘 퍼먹을 수 있는데.
그날 우리를 담당한 이타마에상은 그 레스토랑의 헤드인 마스다상이 도쿄에서 운영하고 있는 스시집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예전에 좋아라하면서 먹었던 것들을 기억하고 쥐어주시는데…
음식 냄새만 맡아도 힘들었다.
결국 깨작깨작 거리다가 저녁은 그대로 패스…..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은 2차로 바에 가서 술을 마시고 노는데,
나는 너무 몸이 안 좋아서 그대로 방으로 ㅠㅠㅠ
이 날만을 기다리면서 내가 1주일동안 일했는데 ㅠㅠㅠ
내가 갖은 생고생을 하고 아무런 보상을 못 받는 것 같아서 너무너무 화도 나고,
하필이면 이런 때 체한 내 몸뚱아리가 너무 미웠다. ㅜㅜ
그런데 아프다고 일찍 방에 들어간 내가 새벽 3시넘어서까지 잠도 안자고 노트북으로 1주일간 못읽었던 스팀잇 글을 읽고 댓글 달러 다닌 건 비밀.ㅋ
#6. 그 다음날도 처음엔 흐려지는듯 했으나, 다시 맑아짐.
밀렸던 스팀잇 피드를 새벽까지 읽으러 다니느라 너무 늦게 일어났다.
사람들은 아프다고 먼저 들어갔던 내가 아침까지 계속 연락을 안받으니까 무슨 일 생긴줄알고 계속 방문 두드리고 초인종 누르고 있더라.
난 귀마개를 하고 꿀잠을 자고 있어서 전혀 듣지 못했지만…
시끄럽게 울리는 룸 전화벨 소리에 겨우 깨서 받으니,
직원의 안도하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또렷하게 들렸다.
내 일행들이 한시간 넘게 걱정하고 있었다고…
좀만 더 늦게 일어났으면 문 따고 들어오는 걸 고려했을수도 있었단다.
허허허.
매우 민망할뻔했다.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 어린이가 되기로 다시한번 다짐했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전날 저녁부터 아침까지 쫄쫄 굶은 나는 푸드파이터처럼 먹었지만)
호텔 근처의 다다미방 스타벅스에 갔다.
예전에 갔을 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그곳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싶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
일본어로 뭐라고 쏼라쏼라 써져있었지만 우리 중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문을 안 열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결국 다다미방 스타벅스랑도 그대로 굿바이.
사요나라.
짜이찌엔.
오사카 공항으로 갔다.
체크인을 하면서 난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업그레이드의 행운이 한 여행에서 두 번 있을리는 없으니.
그런데 행운의 여신이 날 불쌍히 여겼나보다.
예쁜 직원분이 날 또다시 업그레이드 해주셨다!!!!!!!!
하긴 1박 2일동안 난 핸드폰님과도 이별했고,
스시님을 눈 앞에 두고서도 쓸쓸히 뒤돌아섰으니.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불쌍하긴 하다.
#7. 맑음 뒤에 흐림이 나타날 차례.
이 글은 비행기 안에서 작성하기 시작했다.
거의 다 작성하고 잠들고는 집에와서 마저쓰고 올린다.
아니면 까먹고 내일 밤이나 낼모레에나 겨우 올릴 거 같아서 ㅠㅠ
이번 주말의 내 패턴을 보면 맑음과 흐림의 반복이었다.
비행기에 탄 것만 봤을때는 맑음이다.
그렇다면 이제 흐림이 등장할 차례라는건데…
대체 어떤 흐림이 등장할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