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지난 칼럼에 댓글을 달아주시니 앞으로 어떻게 글을 써야할 지 감이 왔습니다.
궁금하신 점들을 댓글로 달아주시면 그것을 주제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실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실천한 이후로 보통 사람들이 하는 질문은 비슷합니다.
저도 비슷한 의문을 가졌었구요.
- 성인은 신생아가 아닌데, 과연 모국어화가 가능한가?
-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 시간이 줄어드는가?
- 언제까지 봐야하는가?
- 주의사항(문자 노출 없애기)을 꼭 지켜야 하나?
- 무슨 뜻인지 몰라 집중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나?
등등 말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그렇듯이 참, 저의 오랜 숙원이기도 했던 영어...
언어가 참 뭐라고 이리도 십 수년간을 투자하고도 말하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강남에 유명하다는 학원도 다 다녀보고, 1만 단어 이상 1초 안에 바로 뜻이 떠오를 때까지 한 토플 단어책을 30번 이상 반복해서 공부하기도 했었고,
외국에 나가서 살아보는 것 빼고는 시중에 정말 많은 것들을 접해보고 전전하다가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실천한 이후 저의 영어공부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사례 연구
영문과에 재학 당시에, 과에서 어렸을 때 영미권 국가에 살다온 경우를 제외하고 영어로 불편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말하는 애들에게 어떻게 영어공부 했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너무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미드를 봤다'고 대답을 하더라.
뭐 어떤 학원에 다녀서 잘하게 됐다느니, 어떤 책으로 공부했다느니 하는 경우는 단 한 사례도 없었다.
- 대학에 오기 이전에 그냥 재밌어서 중고등학교 시절 미드를 정말 많이 봤다.
- 해외 유튜브를 보는 게 재밌어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계속 봤다.
- 어렸을 때 엄마가 원어민 과외를 붙여줬는데, 더 어렸을 때에는 비디오를 틀어주셔서 그걸 계속 보고 자랐다.
예외가 없었다.
모두 말하기, 읽기, 쓰기 이전에 오로지 '듣기'를 선행한 경우였다!
한국에서 보통 이루어지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the teaching of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who live in a country where English is an official or important language)에서 주장하는 언어의 4대 영역인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를 동시에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과 매우 상반된다.
'자막없이 영화보기'는 ESL이 아닌 'bilingual(이중언어구사자)'을 지향하는 모국어화 방법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똑같이 미드를 봤어도 그것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미드를 반복재생하면서 쉐도잉 한다거나, 스크립트를 외우고 공부하는 사람은 이상하게도 그것만 듣고 외워서 말할 줄 알지, 조금만 다르게 말해도 너무 빨라서 못알아 듣는다거나, 뭔가 자신감은 충만하나 실제로 쓰이지 않는 말들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어떻게 하면 아무리 빨리 말해도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고, 내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사례 외에 다른 사례들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구글링을 하는데, 30대 성인이 되어서 자막없이 영화를 약 1년 반 동안(하루 8시간 정도 투자하심) 본 후에 모국어처럼 들렸다는 사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분은 그렇게 귀가 트인 후 유학을 가게 되었고, 실제로 그 분을 비롯하여 많은 성공사례들을 직접 만났었다.
영어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셨고, 원어민과 만나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셨다.
나는 이제껏 내가 관찰하고 발견한 사실들에 기반하여, 모든 것을 중단하고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2015년 봄, 실천 초기
그렇게 2015년 봄, 나는 듣기 완성 이전에 문자노출을 피하기 위해 전공이었던 영어영문학과 수업을 하나도 듣지 않고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영문과 수업을 따라가려면 계속해서 단어를 외워야 했고, 영문 에세이를 작성해야 했고, 원어민 교수님과 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너무나 무모하고 바보같은 선택을 했다고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그만큼 나는 방법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해 볼 것 안 해 볼 것 없이 다 해 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을까. 더 이상의 방황은 없을 것이라 기대했다. 혹여나 실패하게 되더라도, 내 인생은 실험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안 되는 방법 하나를 알려줄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 들었다.
IPTV로 자막을 가리고 (지금은 넷플릭스로 본다)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힘들었다. 생각을 버리고 영화에 집중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들리는 단어의 뜻이 저절로 번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어 뜻이 떠오른다거나, 문법이 생각난다거나, 이렇게 한 번 생각이 개입되게 되면 거기에 사로잡혀 다음 소리를 계속 해서 놓치게 되어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가 없다.
중국어는 내가 단 한 번도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는 언어여서 중국 드라마를 잠시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영미권 영화를 볼 때 보다 '아무런 편견 없이' 소리 그 자체가 들리는 것이었다. 소리가 너무 재미있고 매력적이기도 했고, 영어를 완성한다면 중국어에 꼭 도전해 보고 싶었다.
하루에 서 너 편 정도를 한 일주일간 자막 없이 보다 보니,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답답했던 것들이 차츰 사라지고, 단어 뜻이 떠오르는 것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영화 자체에 몰입을 하려 노력했고, 생각보다 정말 볼 만 했다. 원래 영화관에도 잘 안 가는 편이었는데, 영미권 영화를 계속 보다보니 아.. 영화가 이렇게 재밌는 것이었구나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실천 초기에 어학원에서 겪었던 일
2015년 상반기에 나는 초중등부 로제타스톤 어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하루에 3-4시간 정도 일을 했었고, 가끔 원어민 강사와 말을 해야했기 때문에 영화보기 실천 시 주의사항을 완벽히 지켰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주로 아이들이 학습하는 것을 관리, 감독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영어를 사용할 일은 별로 없었다.
학원에는 캐나다에서 온 원어민 강사가 있었는데, 그 분이 조금 말을 빨리 하는 편이라서, 천천히 말해주지 않으면 평소 모든 말을 다 알아듣긴 힘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그 분이 나에게 뭐라뭐라 말했는데, 내가 듣자마자 바로 알았다고 반응을 했다.
순간 나도 너무 놀라, 내가 방금 한국어를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냥 긴 문장이 '통째로 내 귀에 꽂혔다'. 해석하지 않고 그냥 이해가 되었다. 처음 겪어 보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가지고 귀가 뚫렸다고 착각하고 말하기로 넘어갔던 사람들의 실패 사례를 이미 search를 통해 알고 있었으므로, 계속해서 묵묵히 영화를 봤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았음을 알고 있었다.
어학원에서 영어말하기대회를 주최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원고를 주고 달달 외우게 연습시켜서 대회에 내보냈는데, 두 아이의 사례가 기억이 난다.
한 여자아이는 영어를 읽을 줄 아는 아이였다. 원고도 너무 잘 외우고 발음도 좋아서 모두가 상을 탈 거라고 기대하는 유망주였다. 그런데 4학년짜리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영어공부를 늦게 시작해서 파닉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원고를 녹음을 해서 주었고, 그 남자아이는 그 녹음된 mp3파일로 듣고 따라하면서 연습을 하였다.
대회 당일이 되었다. 그 유망주 여자 아이는 원고를 분명히 달달 외웠는데 대회 당일날, 갑자기 중간에 백지 상태가 되어 중간 부분을 날려 먹는 실수를 하고 울면서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그 글자를 읽을 줄 모르던 남자아이 차례가 되었는데, 너무나 유창하게 말을 잘 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넌 어떻게 그렇게 연습을 했냐고 묻자, 그 아이는
"선생님이 녹음해 주신 것을 천 번을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아~ 이게 무슨 뜻이겠구나를 알게 되었다"고 답하는데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바로 자막없이 영화보기와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천 번을 들었다는 것은 실제로 천 번이 아니라 '그만큼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모국어를 할 때에도 '엄마, 아빠'라는 말을 수 천번, 수 만번 듣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 아빠'라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충분히 들은 후에야 말문이 터지는 것.. 충분히 들으면 무슨 뜻인지 저절로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문리가 터지는 과정'이라고 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2015년 하반기의 몰입
주의사항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나는 어학원 일도 그만두고, 휴학까지 감행하였다. 그리고 미친듯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하루 5시간 정도 웹 에이전시에서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정말 영화만 봤다.
그 당시 기숙사에 살고 있었는데, 기숙사를 같이 쓰던 룸메가 어느 날은 내가 자고 있는데, 자는 줄 모르고 나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었는데 내가 영어로 답을 하더라고 말했다.
마치 영어로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많았다. 나도 모르게 누가 툭 치고 지나가면 영어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그 감정에 연결되어 있는 감탄사나 자주 들었던 짧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렇게 2015년 하반기에 집중적으로 영화를 보다가, 나도 졸업에 대한 압박이 들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내가 뭐하고 사는 지 알지도 못했고, 그저 학교를 잘 다니는 줄로 알고 계셨으니 말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2016년 공백기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야겠다는 압박감에 다시 학교는 가야겠고, 그런데 전공이 영문학이었던 터라, 주의사항을 어기게 되는데.. 3천 시간 정도를 봐야하는데 아직 1000시간도 보지 못해서 나는 아직 듣기가 완성된 것이 아닌데하는 고민이 들었다. 1년 간 영화를 봐 온 것이 물거품이 될까봐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또 다시 과감하게 '경영학과'로 전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지.. 경영학과로 전과를 하면 영어수업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공필수가 거의 다 영어로 진행이 되었다. 시험도 영어로 보고, 영어로 토론을 해야 했다.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기왕 졸업을 하기로 마음 먹은 거 그 때까지만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했다. 또 졸업요건에 토익 점수가 있어 '16년 봄에 난생 처음으로 토익을 쳤는데, 855점이 나왔다. 공부를 하고 학원을 다녔으면 900점대를 받겠지만, 큰 욕심이 없어 만족했다. 문제풀이 기술을 익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여느 대학생들과 다를 바 없이 학교수업에 적응하고, 대외활동을 하고,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았다.
'16년도에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서울을 무료로 투어시켜주는 봉사활동을 6개월간 하였다. 이미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통해 영어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었는데, 당장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하여 설명을 해줘야 하니, 다시 이전처럼 번역식으로 말을 해야 했는데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말은 하려고 노력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듣는 양이 충분히 흘러넘치면 저절로 나오는데 다시 두 가지의 패러다임이 충돌하니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리고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중단하고 학교로 온 것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와 다른 문화권에서 온, 나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는 것 자체로도 엄청난 기쁨이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그 갈증이 나에겐 더 컸기 때문이다.
'내가 영어를 좀만 더 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 갔다.
그렇게 2016년을 보내고 나는 다시 2017년 초에 영어는 내 인생에서 꼭 필요한 요소였다는 것을 깨닫고,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다시 시작했다.
영어 듣기의 단계
영어듣기를 하는 데에 있어서 초기, 중기, 종기의 단계로 구분을 하자면 이렇다.
초기 - 아는 단어가 들림. 전반적으로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음.
중기 - 가끔 선명하게 들릴 때가 있음. 컨디션에 따라 잘 들리는 날이 있고 안 들리는 날도 있음. 영어로 잠꼬대를 한다거나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 나옴.
말기 - 마치 모국어처럼 천천히 들림. 문장이 통으로 들어옴. 상대가 아무리 빨리 말해도 한 번 듣고 모방할 수 있음.
나는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점이 조금 빨리 왔었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는데,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일수록 언어에 대한 감각이 예민하기에 더 그 시점이 빨리 찾아올 수 있다.
여기서 중기의 단계가 가장 길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게 2-3달 걸렸지만, 아직도 중기에 머무르고 있다. 몇 일 연속으로 집중해서 많이 들으면 귀가 뚫린거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몇 일 안들으면 다시 조금 둔해지기도 하고 그렇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안 들으면 뭔가 이를 닦지 않은 것처럼 찝찝하고 허전한 순간이 오는데, 그 때부터는 조급함이나 이 방법으로 될까?라는 불확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하기만 한다면 100퍼센트의 확률로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 이것을 중기 이후로 직접 느껴보는 게 중요하다. 실제로 내가 운영하고 있는 자막없이 영화보기 커뮤니티에서도 일정 시간 이상 보신 분들은 더 이상 질문이 없어지신다..
물이 끓기 전 99℃에서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100℃를 넘겨서야 비로소 팔팔 끓듯이 영화를 본 시간에 '비례하여'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통해 모국어화를 하는 과정은 A가 아닌 B에 가깝다.
양(量)적인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질(質)적인 변화는 갑자기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