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문학을 전공할 당시 1만 개 이상의 단어가 수록되어 있는 토플단어책을 30번 이상 음성을 듣고 따라 읽고 암기했었다.
그리고 단어와 단어 뜻 뿐 만 아니라, 예문까지도 빠른 속도로 읽었다.
그 당시에는 하나의 단어책을 30번 정도 반복하자 어떤 단어를 보거나 들으면 1초도 안되어 바로 한국어의 의미가 번역되어 떠오르곤 했다.
그 번역의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치 바로바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한국어를 먼저 떠올려도 자동적으로 해당 의미가 번역이 되니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었다.
어휘력이 좋다는 칭찬도 들었고, 적재적소에 참 알맞은 단어를 떠올린다는 말도 들었지만, 내가 구사하는 문장이 이상하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학업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단어를 조합하다 보니, 실제로는 쓰이지 않는 문장일 때도 있었고, 지나치게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다고도 했었다.
그리고 2011년에 발음학원도 다닌 적이 있다.
알파벳 하나하나 어떤 혀의 위치로 발음을 해야 하고, 어떤 소리가 나는 지 배우고 연습했었다.
수강생 중에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아무리 연습해도 수업 시작 때나 끝나갈 때쯤이나 발음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나도 그냥 더 정확하고 크게 발음을 하게 되었을 뿐 원래 발음을 할 수 있었던 것들을 다시 이론적으로 배운 것 뿐이었다.
마치 장기기억으로 전환된 것 같았던 단어 또한 시간이 지나니 쓸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토록 열심히 단어를 외우고 발음연습을 한 것이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외국어를 익힐 때 왜 단어를 외우거나 발음연습을 할 필요가 없는 지 그 이유를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의미를 알아야만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내가 아는 것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실천한다고 했을 때, 자신은 단어도 많이 모르고 들리는 게 거의 없어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았다. 나 또한 많이 알아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어를 많이 알아서 뜻이 떠오른다면 더욱 듣기에 불리하다고 할 수 있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배운 과정을 떠올려보자.
어렸을 때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그 의미를 상황이나 맥락을 통해 짐작을 하거나, 방금 들은 그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아빠, 철수하는 게 무슨 뜻이야?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내가 '철수'라는 단어를 듣고 그 소리를 인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간단히 설명을 해 주셨고, 나는 그 의미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친구들과 대화할 때 그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굳이 사전을 찾아서 단어와 뜻을 외우지 않아도 한 번 듣고 그 의미를 대략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어 조차도, 평소 사용하는 말들 중에서 100%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사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나는 말할 수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들을 수 있는 것을 말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공부를 해서 그 의미를 완전히 익히고, 그걸 내가 말할 수 있게 되면, 들을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그래서 단어를 외우고, 어떻게 발음하는 지를 공부한다.
하지만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소리를 자주 듣다 보면, 그 의미까지도 어느 순간 다가오게 된다.
나도 그 뜻을 모르지만 그 말을 어느 새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영화를 보다가 여러 감탄사와 추임새? 그리고 what is that 같이 그냥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들,
어떤 상황이 왔을 때 왠지 이 말이 어울릴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뱉었는데,
사실은 그 상황에 맞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던 것..
이런 일들은 나의 무의식이 영어의 소리를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과정 중에 일어나게 된다.
내가 이럴 때 이 말을 써야지하고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나오게 되는 것.
자주 듣고 접하다 보면 그 소리에 사실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듣기가 선행이 되면 말하기는 덤으로 따라온다
듣기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말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없다.
말하는 연습을 하게 되면 내가 외우고 연습했던 말만 하게 되고, 그 말이 조금만 다른 상황이 되거나 빠르게 말하면 어차피 잘 안들린다.
흔히 하는 실수가 쉐도잉한답시고 자막 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듣고 반복해서 따라해 봤자, 실제로는 들리는 게 아니라... 내가 공부하고 외운 문장을 들린다고 착각하는 것 뿐이다.
나는 주로 미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라디오는 BBC를 듣는다. 미국식 발음에만 익숙했었는데, 영국 라디오를 많이 듣다보니 어느 새 영국 발음도 그 이전보다 훨씬 친숙하고 느리게 들린다.
많이 듣다보니 예전에 영국발음을 따라하기 어려웠던 내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영국발음을 어렵지 않게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발음 연습 또한 할 필요가 없는게,
발음이 좋은 사람들은 발음 연습을 많이 해서 좋아진 게 아니라 많이 들어서 따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을 배우는 단계에 있는 어린 아이일 때에는 모국어라 하더라도 누구나 발음이 부정확하고 어눌하다.
아시아인이 서양인들과 구강 구조가 달라서 발음이 나쁜 게 아니다.
발음이 구강 구조와는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의 예를 들어보면, 사람의 말을 따라할 수 있다는 새나 돌고래를 생각해 보면 된다.
앵무새들은 부리가 있고, 아무리 다른 새들의 비해 인간의 혀와 구강구조를 닮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것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그런데 혀와 구강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발음교정을 위해 혀 수술까지 받는 사례가 있었다고 하니 참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구강구조를 바꿔야 소리를 잘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소리를 자주 듣다 보면, 그 소리에 최대한 가깝게 내가 흉내를 내려고 혀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성대모사를 잘 하는 사람들도 그 모사의 대상을 여러 번 듣고 특징을 파악하고 그것을 따라하려 하다보니 자연스레 표정이나 입 모양이 바뀌게 되듯이 말이다.
이것이 잘 들을 수 조차 없는데, 회화학원을 다닌 다거나, 억지로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별다른 성과를 가져다 주지 못하는 이유이다.
<참고> 지난 글 읽기
#001. 자막없이 영화보기의 원리 (나는 이제껏 700편이 넘는 영화를 보았다.)
#002. 나는 왜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시작하였는가?
#003. 자막없이 영화보기를 실천하는 방법
#004. 나의 자막없이 영화보기 실천과정(2015-2017)과 영어듣기의 단계
#005. 얼마나 투자하여야 하는가?
#006.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봐야하는가?
#007. 70대 조차도 성공할 수 있다 (사례 - 대구 영어 할머니)
#008. 핀란드인들은 왜 국민의 80%가 이중언어구사자일까?
#009. 영화 보다가 자꾸 딴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010. 번역기와 동시통역기가 있으면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
#011. 집중해서 듣는 것과 흘려듣는 것은 사실 본질적으로는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