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의 아동들. 그들에게 있어 '중졸'은 무슨 의미일까?
일전에 국정농단 사태를 촉발시킨 정유라의 학력이 중졸로 내려앉았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고, 너나 할 것 없이 키득대며 ‘중졸, 중졸’ 말하는 것이 나는 탐탁지 않았다. 물론 자신보다 못하다고 자만하던 사람이, 그가 무시하던 대상들보다 ‘못한’ 학력을 가지게 된 것이 조롱의 대상이 될 만은 하다. 나 역시 정유라가 말한 소위 ‘잘난 부모’의 조롱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녀를 용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파렴치한 자의 비행을 비난하며 영문도 모른 채, 함께 비난받게 될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분노가 크더라도 언행을 삼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장에서 일하면서 중졸 학력을 비롯해 정규과정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사람들을 더러 보았고, 과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만 고단한 삶 속에서도 검정고시 등을 준비하며 보다 발전된 인생을 다짐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내가 생계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며 대학생들을 부러워했던 20대 초반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도 안타까웠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학력이 낮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처럼 여겨진다. 평균적으로 학력이 낮은 사람들이 고된 일을 맡아서 하며, 사회적 지위도 낮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으므로, 사회 전체의 과실 중 극히 일부분만을 취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들에게서 어떤 무엇을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관계, 거래에서 이득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관계에서나 최우선적으로 배척된다.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은 ‘죄’로 이들은 기피대상이 되며, 기피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다양한 굴레로 핍박하기 시작한다. 사실 가난하거나 배우지 못한 죄밖에 없는 선량한 이들도, 이 때문에 덩달아 억압된다.
나만 못한 사람을 향해 비난을 퍼붓거나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쉽고, 때로 에라스무스의 말처럼 ‘전쟁은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겐 유쾌한 일’이듯이 전쟁 바깥의 누군가에겐 재미있기까지 하다. ‘빈곤의 포르노’라는 말이 있듯이, 개발도상국이나 폐허의 사람들을 미끼로 기부금을 얻으려는 방송들이 제법 ‘인기’가 있는 이유 속에는 정말 안타까워서 그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량한 마음도 있지만 그것으로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자 하는 심리도 있다.
『논어』에서 공자가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은 것보다, 가난하면서 즐기는 것이 낫다’라고 한 것이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즐거운 것들을 삼가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들을 견뎌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한 것처럼, 더 나은 위치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것은 쉬우며, 또 그만큼 무심코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한 편으로 어차피 도움도 안 되는, 오히려 내게 지장을 주거나 방해가 될 확률이 높은 이들을 저버리고 모욕하는 것이 큰 잘못인가, 되묻는다면 그것이 큰 잘못이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살인처럼 그 행위를 절대로 해선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모욕감은 줄지언정 그 사람에게 직접 해를 가하는 것은 아니니까.
삶의 방식은 다양하고, 모두는 각자의 방식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살아간다. 비록 그 삶이 힘들고 고될지라도.
하지만 일전에 썼던 <12. 장애인이 무슨 자랑이에요?>와 같은 글에서 지적했듯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함정으로 몰아넣는 위험한 공격이 된다. 내가 신이 아니라면, 나보다 나은 인간이 반드시 있다. 또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도움을 받는다. 하다못해 오늘 내가 대변을 보는 일도, 변기를 설치하는 설비공과, 정화조를 비우는 인력들이 없다면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할 수는 있어도 그렇게 깔끔하게 뒷처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외에도 같은 방식으로 전혀 내게 도움을 주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도 실은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식으로 모두가 연결되어있다.
그러니까 애당초 ‘나는 저런 류의 인간에게 도움을 받았을 리 없어!’라는 거짓말보다 더한 거짓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면, 최소한 어떤 인간이건(죄악뿐인 인간, 극악의 범죄자가 아니라면) 간에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딱히 천대할, 마땅히 미워해야할 이유가 없는데도 사람들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더 가벼운 이유로도 사람들은 억압받을 수 있다. 예컨대 못 배워 가난한 사람이 멸시 돼도 좋다면, 같은 이유로 장애인을 멸시해도 좋을 것이고, 상대적인 약자들도 멸시받아도 좋을 것이다. 이런 혐오가 연쇄반응을 일으키면 결국 세상은 나 이외의 것은 모두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연속이며, 나 자신조차 누군가에겐 멸시되어도 좋을 상황이 벌어진다.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본인은 사람이 사람을 뜯어먹고 있는 지옥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지옥의 광기는 우리가 숱한 역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했으므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막연히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물론 가끔 비천하면서도 악의에 가득 찬 인간도 있다. 즉, ‘약자이면서 악한’ 부류가 그것이다. 이는 나중에 자세히 다룰 테지만 그러한 자들이라면 마땅히 멸시해도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도 ‘마땅히 미워해야할 이유’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며, 설령 멸시한다하더라도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러운 방법으로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유라의 입학 취소 기사’와 사람들의 반응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연중에 자리 잡은 부정한 것들을 드러낸 좋은 예다. 사실 학력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처럼, 이를테면 세대갈등으로 빚어지는 각종 신조어들, ‘틀딱’이라거나 ‘급식충’ 같은 말들도 내가 보기엔 상당히 위험하다. 말 자체 보다, 그 말을 만들어낸 마음들이 위험한 것이다.
이런 부정한 마음들은 걷어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인식의 개선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이 변화하더라도, 이미 언어에 뿌리 깊게 녹아있거나, 전통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등, 그 근원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성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되묻는 수밖에 없다.
때로 이것은 피곤할 정도의 자기반성으로 이어지고 사람들을 소심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단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생겨선 안 된다’는 유명한 법언처럼.
*이 작가는 다음과 같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 <이 하나의 장면, 명장면 철학 읽기>
*지나간 영화들의 좋은 장면을 골라 집중적으로 리뷰합니다. - <필룸>
*현재 개봉중인, 개봉 예정인 작품들을 리뷰하며, '당신을 영화 시사회에 초대합니다'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생각중독>
*다양한 주제에 대해 고찰하는 에세이입니다. - <시작, 詩作>
*작가의 자작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