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통신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은 겨울 방학 아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든 나를 다급한 목소리로 흔들어 깨우셨다.
"일어나 봐라, 얼른!"
나는 채 다 뜨지 못한 눈을 억지로 비벼가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한 손에는 공과금 영수증들이 쥐어져 있었고, 한눈에 보아도 갑작스럽게 늘어난 통신료에 대한 성화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니, PC 통신으로 뭐 하는데?"
"얘기했잖아요, 사람들이랑 대화도 하고, 글도 쓰고, 필요한 정보도 얻는다고요."
"은행 여직원이 그라는데, 요즘 아들(애들의 경상도 표현) PC 통신으로 야한 거 보고 그란다 카든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단지, 늦은 밤까지 컴퓨터를 하는 그 모습 자체가 싫어서 몇 마디 하겠거니 싶었다. 아니면 너무 많이 나오는 요금에 모두 줄이고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실 줄로 알았지, 그런 이야기를 하겠다고 흔들어 깨웠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비싼 요금과 전화세를 따로 내가면서 내가 왜 그런 것을 해야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지금 생각해도 웃긴 것은 그런 야한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따지자면 그 은행원 덕분에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말한 은행원이 누군데요?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것도 엄마가 방금했던 그 말 때문에 알았네,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이 그따위로 떠들지요, 그 은행원이 누군지 말하세요. 당장 가서 귀싸대기 한 대 올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안 한단 말이가?"
"안 한다고요!"
"앞으로도 안 할 거가? 니 이랄거면 PC 통신이고 뭐 싹 다 불사질러버린다"
"..."
정말이지 그 순간에는 그 은행원을 찾아가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부아가 치민다.) 내가 하는 것이라곤 고작 원격지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었고, 또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설레하고 있었다. 또한, 프로그래밍을 위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구가 되어 주었다. 당시 컴퓨터 공학 분야에서 붐이 조성되기 시작했었고, 덕분에 컴퓨터를 전공하는 대학생 누나 형님들로부터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와 기법 또는 트러블슈팅을 접할 수 있었기에 나로서는 그만한 선생님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중고등학생으로서의 직분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과, 지금껏 살면서 후회하는 몇 안되는 것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 게 가능한지도 몰랐고, 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놈의 약속을 하란 건데요? 차라리 그 은행원한테 가서 따져요."
그날 아침의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의 생활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던 대로 정보를 교류했고, 프로그래밍 기법과 시장의 동향 그리고 전공생들이 무엇을 배우는지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혼자서 MIDI 음원을 만들어서 게임에 삽입할 재료로 준비했고, 페인트 샵을 배워 도트 디자인도 했다. 게임상에 구현되는 모든 배경 화면과 캐릭터의 디자인을 점 하나하나를 찍어가면서 만드느라 며칠 밤을 새웠고, 음영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웠다가 새로 만들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 끝에 '슈퍼 윙'이라는 게임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천리한, 하이텔, 나우누리 3사 게시판에서 1위와 2위를 번갈아가면서 오래도록 상위에 랭크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프로그래밍에서 손을 뗀 지가 20년이 다 돼 가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살면서 느껴 본 어떤 아찔함보다도 더 크게 다가온다. 지금으로 보자면 드라곤 플라이트와 같은 게임이었는데, 그런 걸 혼자서 만들었다고 생각을 하면 나도 어쩌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드라곤 플라이트를 처음 마주했을 때) 지금과 같은 인터넷이 잘 발달되고 여러 사람들과 협력을 이루어 스타트 업을 할 수 있는 생태계가 되었다면 나도 충분히 그런 대박 하나는 칠 수 있지 않았을까? ;)
이후로도 몇 개의 게임을 혼자서 만들었고, PC 통신 자료실에 출시(?)를 하면서 마이컴이라는 잡지에도 조그맣게 게재가 될 정도로 나의 아이디는 유명해졌다. ㅋㅋ 또한, 어셈블리어를 활용한 하드디스크 스핀들의 회전 속도를 향상시키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는데, 이전에 만들었던 그 어떤 게임과 유틸리티를 훨씬 압도하는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하드디스크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그걸로도 부족했던 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오버클럭킹을 가능하게 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 맞다. 이건 내 자랑이다. 몇 번의 성공과 함께, 더욱 욕심을 냈던 나는 혼자서 더 많은 것을 하려고 하다가, 스무 살을 고작 넘은 시점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만둔 이후로는 서버 엔지니어링과 관리를 거쳐 가상화 그리고 클라우딩을 하기에 이르렀고, 지금은 외국계의 IT 기업에서 애플리케이션 분석과 인프라 어드민을 겸하고 있다.
만약, 나의 온당한 의지가 그 고작 은행원 한 명에게 꺾일 정도로 약했거나 당위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이 IT 업계에서 밥을 먹고살고 있었을까? 물론, '고작' 그 한 사람 때문에 의지가 꺾이거나 꿈을 접어야 할 정도였다면 무엇을 하더라도 제대로 할리가 없을 이유로, 제대로 된 물음은 아닌 것 같다. 가끔씩 나는 부모님께 당시로서는 몹시도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았을 컴퓨터를 사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말씀을 드린다.
"그때, 180만 원이라는 큰 돈을 들여서 내한테 컴퓨터 사주신 거 지금 생각해보면 잘하셨지요?"
"그래, 맞다! 니 말이 맞다."라고 엄마는 대꾸를 하시고, 아버지는 옅은 웃음을 띠고 계신다.
암호 화폐와 블록체인 생태계에 대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얄팍한 수준의 지식을 급조하여 있는 대로 입을 놀리는 정부의 관료들과 수많은 보수적 꼴통들이 판을 친다. 국민을 상대로 적법한 법안과 규제안이 마련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거래소 폐쇄"를 쉬이 입에 담아 시장을 위축시킴으로써, 오히려 투기를 부추기는 꼴이 되었다. 또한, 수많은 국민들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안겼으며, 이후에는 그들의 지지율 이탈을 계산에 집어넣는 어느 놈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지금껏 숱하게 보아온 위정자들의 본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아마추어들이나 할 법한 졸속한 정책과 언론 조장을 통해 세수 확보와 투기 차단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심산인 듯싶다만, 어디까지나 국민을 기만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이제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는 유망한 새싹을 짓밟게 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이는 단지, 내가 암호 화폐에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로 인한 손해가 발생해서가 아닌, 오로지 '블록체인'과 '암호 화폐'가 가져다줄 신문물과 사회 변화의 가능성의 새싹을 마주하기도 전에 우리의 무지로 말미암아 죽여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서다. 세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흥선대원군과, 당시 인터넷을 바라보던 몰지각한 사회단체와 그 시류에 휩쓸린 조악했던 정부 관료들 덕분에 우리는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뒤처졌고 또 그럴 뻔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면 한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다. 제대로 된 이해와 시작 정도는 해보고 나서 이렇다 저렇다 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