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서양 근대 윤리학은 고대 윤리학을 양분으로 자라났다. 근대 윤리학을 대표하는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홉스, 벤담, 밀, 칸트, 헤겔 등은 고대 윤리학을 변용한 학자들이다. 그리고 현대 윤리학은 열거한 근대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그 중에서도 스피노자와 칸트는 고대 윤리학 중에서 스토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더불어서 그의 예정설 등은 스토아주의를 연상시킨다. 또한 칸트 역시 자유의지 등 여러 주제들에서 스토아주의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근대의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그들의 윤리학은 현대에 들어서서는 많은 영향력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대체적으로 현대 윤리학의 쟁점 중 하나인 자유의지의 문제, 스토아주의 특유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 등 다양하다. 그러나 필자는 현대에 들어서서도 스토아주의 윤리학은 최소한의 수정을 거치면 받아들일만하다고 생각한다.
2장에서는 스토아주의 윤리학의 기본 원칙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스토아학파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그들의 복잡한 형이상학적 체계보다 윤리학을 살펴보고, 윤리학과 연관된 형이상학적 전제들 만을 그 다음 장에서 다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특히 스토아주의 윤리학이 현대 우리의 몇몇 직관과 매우 연관된다는 점에서 스토아주의 윤리학에서 덕 그 자체를 중시하는 그들의 윤리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3장에서는 본고의 핵심은 스토아주의 윤리학과 그들의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특히 그들이 형이상학이 스토아주의 윤리학을 도출하기에 무리가 없는지에 대해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이때 문제가 되는 쟁점은 규범 윤리학으로서의 스토아주의 윤리학과 범신론과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유물론적 인과결정론의 양립 가능성 문제이다.
4장에서는 3장에서 다루어진 쟁점을 바탕으로 스토아 윤리학을 현대에도 받아들일만한 이론으로 적절하게 수정하고 제안할 것이다. - 스토아주의 윤리학
스토아주의 윤리학은 “한결 같은 태도이자 심리적 일체감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내적인 균형과 조화를” (호센펠더말테, 2011 :109) 추구했다. 그들이 추구하던 상태를 ‘아파테이아’라고 부른다. 그런데 규범 윤리학으로서 스토아주의 윤리학이 아파테이아를 추구하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우리가 이상적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자는 아파테이아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파토스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파토스는 감정이라는 말인데, 자극과 흥분의 상태를 가리킨다. (호센펠더말테, 2011 :110) 이 감정은 영혼의 비이성적 특징 이다. 이때 감정은 크게 쾌락, 불쾌감, 욕망, 두려움으로 구분된다. (호센펠더말테, 2011 :114) 스토아주의에서 감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행위 이론과 연관이 깊다.
[스토아주의의 행위 논제] 인간의 행위는 어떤 행위 A를 하기 전에 이성을 통해 그 행위를 상상한다. 그 상상이 충동으로 연결되고, 이 충동이 행위로 연결되기 위해서 이성의 합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스토아주의의 행위 이론을 통해서 감정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잘못된 상상을 통해서 충동을 느끼고, 이성의 합의를 통해서 그 행위를 실천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잘못된 것을 선으로 여기고 행위로 실천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 결과 그 행위를 통해서는 그 충동을 충족시킬 수 없으므로, 계속해서 충족되지 않는 것을 원하게 된다. 이 사람은 자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계속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충동은 인간의 행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게 되고, 이러한 감정은 영혼의 비이성적 움직임이고,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 (호센펠더말테, 2011 :114) 이러한 충동, 감정의 발생은 이성의 잘못된 판단이 그 조건이다. 그렇다면 이성이 올바르게 판단한다면 이러한 충동이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논제의 형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스토아주의 감정 논제] 충동의 발생에 대해서 이성의 잘못된 판단이 그 충분조건이라면, 그 대우명제인,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충동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명제도 참이다.
이러한 감정 이론이 스토아주의 특유의 윤리학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행복 분석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복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다.
[스토아주의의 행복 분석] 어떤 사람이 행복하다는 명제는 감정이 완전히 부재하다는 것이 참일 때, 바로 그때에 참이다.
스토아주의 행복 분석은 감정이 부재할 때(아파테이아) 행복하다는 것인데, 감정이 부재하다는 것은 스토아주의 감정 논제에 따르면, 이성이 옳은 판단을 내려 합의한다면, 감정은 발생하지 않는다. 즉 이성의 올바른 판단이 선행한다면, 그 인간은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스토아주의의 행복 분석을 통해서 덕 그 자체를 중시하는 윤리 이론을 발전하게 된다.
스토아주의 덕 이론은 스토아주의에게 영향을 미쳤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해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명제 “덕은 곧 지식이다.”를 통해 덕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들어냈다. 스토아주의 역시 덕을 지식과 연관된 문제로 보았다. 다만, 그들의 미덕 분석은 지식, 즉 영혼의 이성적 활동과 연관이 깊지만,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들이 미덕 분석은 다음과 같다.
[스토아주의 미덕 분석] 어떤 사람이 미덕을 가졌다는 것은 충동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영혼의 이성적 능력이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스토아주의의 미덕분석의 정의항은 행복에 대한 분석의 정의항과 동일하다. 즉 미덕이 참이라면 바로 그때 행복도 참인 것이다. 그렇기에 “미덕은 실제 행위에서 행복과 동일시된다.” (호센펠더말테, 2011 :129) 따라서 행복을 추구하는 스토아주의의 윤리학은 덕 그 자체를 중시하는 윤리학이 된다.
그런데 스토아주의 윤리학은 계속해서 우리의 내적 상태에 대한 통제를 강조한다. 즉 외적인 어떤 행동을 통해서 행복을 얻거나, 또는 덕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상태에서 이성의 올바른 활동이 곧 덕이고 행복이 된다. 이것은 스토아주의 윤리학의 다음과 같은 사실 명제에서 기원한다.
[스토아주의의 사실 명제] 외적인 사물에 대해서 관여할 수 없다.
즉 외적인 사물에 대해서 관여할 수 없다면,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결국 인간의 내적 상태에 대한 관심으로 집중될 수 밖에 없다. 스토아주의의 사실 명제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명제인데. 이 것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 스토아주의 형이상학과 윤리학
스토아주의 형이상학은 매우 방대하지만, 그들의 윤리학과 연관된 부분만을 적절하게 살펴서 그들의 윤리학이 형이상학을 통해서 도출 가능한지 따져보고자 한다.
스토아주의 윤리학의 논변의 핵심은 범신론과 유물론적 인과 결정론, 그리고 합리주의로 이루어져 있다.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육체적인 것은 재료와 이성의 원리로 존재한다. 재료는 그 자체로는 형태도 속성도 운동도 없이 존재하지만, 이 모든 것을 취할 수 있고, 나아가 형태들 속성들 그리고 운동들을 위한 실체로 여겨진다. 반면 이성은 작용하는 원리로서 물질에 형태를 두고 속성을 부여하며 움직이게끔 하듯 재료를 완전히 관통하는 무엇이다. 스토아학파는 이렇게 로고스를 이 세상에 그 고유한 모습을 알선하는 원리로 삼았다. (호센펠더말테, 2011 :191) 즉 스토아주의 윤리학은 재료와 이성을 통해서 물질적인 것을 설명한다.
이성은 세계 이성의 일부분이다.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세계는 세계 이성의 목적(합리주의)에 따라 운행된다. (롱엔소니, 2000) 이것은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참이라고 받아들여졌던,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파생된 것이다. 세계이성은 로고스, 신적인 불로 종종 표현되었는데, (롱엔소니, 2000) 이 신적인 불과 관련된 그 공기(프네우마)로 세계가 구성되어있다. 이것은 세계이성의 일부분으로서의 이성(범신론)이 재료에 귀속시키는 그 속성이 더움, 차가움, 축축함, 마름, 곧 4가지 원소임이 그 증거이다.
그런데 스토아주의는 철저하게 유물론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성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유물론의 원리와 위배되는 것이다.
[스토아주의 유물론 논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인 원소로 구성되어있으며, 인과 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이성은 직관적으로 물리적인 원소로 구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성은 물질 구성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이성의 원리는 인과법칙이다. 이러한 유물론 논제 안에서는 인과법칙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원인과 결과로 결정된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이상학적 원리는 윤리학의 기본 명제인 “인간이 외부 사물에 관여할 수 없다”를 도출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점에서 스토아주의 윤리학은 형이상학에서 도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토아주의 윤리학은 첫째, 행복을 추구하라고 명령한다는 점, 둘째, 스토아주의자인 에픽테토스의 충고는 무엇인가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점, 셋째,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보존할 수 없다는 점 등을 바탕으로 하면 이러한 형이상학의 체계에서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 현대적 적용
스토아주의 형이상학은 과연 이러한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음을 본 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스토아주의 윤리학의 핵심 논변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스토아주의 윤리학의 행복 추구 명제] 외부 사물에 대해서 관여할 수 없다면, 윤리학의 영역은 인간의 내적 상태, 곧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으로 한정된다.
[스토아주의 유물론 논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인 원소로 구성되어있으며, 인과 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스토아주의의 문제는 인과적으로 결정된 세계에서 어떻게 행복을 추구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다. 또한 인과결정론의 세계에서 도덕적 책임을 면책하는 것 같은 이들 이론이 도덕적인 칭찬, 또한 에픽테투스의 명령 등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등이다. 피셔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통제라는 개념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FischerJohn, 2007 :46) 피셔는 프랑크푸르트 예시를 통해서 이러한 두 가지 통제를 설명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예시로 들어가보자. 프랑크푸르트가 제안한 예시에 따르면, 철수는 민주당에 투표하기로 이미 정했다. 그런데 철수 모르게 신경과학자 영희가 철수의 뇌에 칩을 심어서 감시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철수가 만약 공화당에 투표하고자 하면 영희가 개입해서 그 선택을 바꾸어 버린다. 철수는 투표장에 가서 민주당에 표를 행사하기로 이미 결정했고, 표를 행사했다. 이 경우에 철수는 공화당에 표를 행사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렇지만 직관적으로 철수가 자발적으로 공화당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예시의 교훈은 우리는 통제 능력에 대해서 나누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철수는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다. 이 것을 피셔는 다른 것을 선택하거나 다른 일을 행할 자유(regulative control)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종류는 철수가 공화당에 표를 행사하기로 선택하는 그 능력(guidance control)이다. 이 경우 철수는 regulative control이 없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 regulative control으로는 도덕적 책임을 제거할 수 없다고 피셔는 말한다. (FischerJohn, 2007 :58) 왜냐하면, 철수의 예시에서, 영희는 철수의 특정한 신경패턴을 관찰하고 있다. 만약 도덕 책임이 다양한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과 연관된 능력을 요구한다면, 특정한 신경 패턴이 들어날 미약한 가능성이 유의미한 종류의 ‘선택’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수는 공화당에 투표하기로 이미 선택했고, 그리고 실제로 투표했다.
이러한 프랑크푸르트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비록 인과 결정론이 참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서 어떤 요인을 구분할 수 있다. 철수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하면서 철수의 숙고와 행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과 철수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하면서 숙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토아주의 윤리학의 기본적인 입장을 보존하면서 그들의 윤리학적 가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예시를 통해서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이 대안적인 선택이 없음을 통해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피셔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받아들이고자 하는 종류의 자유의지를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인과 결정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스토아주의 윤리학이 필요로하는 자유의지(혹은 통제 능력-피셔는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동의하기에 충분하다. (FischerJohn, 2007 :72-73))는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어떤 남자가 방에 납치되어 왔을 때, 그 방은 문이 잠겨있다. 이 경우에 이 사람이 방에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지 않고 그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피셔가 말하는 guidance control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이 사람이 방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거나, 문을 부수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나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도덕적 책임 혹은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사람의 도덕적 판단 능력의 손상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 나가고자 하지만,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스토아주의가 요구하는 정도의 선택능력은 가질 수 있다. 그 사람은 분명 나가기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그 환경에 영향을 미치거나,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철수의 예도 마찬가지로 그는 칩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다.) 스토아주의자 역시 외부의 환경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법칙으로 정해진 것을 벗어날 수는 없다. 다만, 그 법칙에 따라 발생한 것을 받아드릴 수 있다. 그 부분은 마치 납치된 사람이 나가고자 노력하기로 선택하거나 그 안에서 쉬기로 하는 상황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스토아주의 윤리학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을 다스릴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나가는 말
스토아주의 윤리학은 그 본래의 형이상학적인 전제들로 인해 존재자의 도덕적 책임성을 잃어버린 윤리학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스토아주의 윤리학의 핵심은 유물론적 인과 결정론의 세계에서 자신의 태도만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과 더불어 태도를 결정하는 것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의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유의지가 행복을 추구함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과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양립불가능 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렇다면 스토아 윤리학은 철학사적 의의가 있지만, 현대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이론이 된다. 그러나 필자는 스토아주의 윤리학이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규범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스토아주의 윤리학의 전제를 최대한 보존하면서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이 양립 가능하다는 피셔의 주장을 도입했다.
그러나 피셔의 반(semi)양립가능주의의 핵심 아이디어인 통제능력의 구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스토아주의 윤리학에 적용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구체적으로 스토아주의 형이상학과 피셔의 분석이 적절하게 상응하지 못하는 것 같은 부분(예를들어 에픽테투스의 윤리학적 명령 등)을 충분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또한 기회가 된다면, 스토아주의 윤리학을 규범으로 현대의 윤리학적 쟁점들에 대해서 다루어볼 필요가 있다. 현대의 윤리적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이론이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규범 이론이 되기 때문이다.참고 문헌
FischerMartinJohn. (2007). Compatibilism. , John Martin FischerKane, Derk Pereboom, Manuel VargasRobert, Four View on Free will (페이지: 44-84). blackwell publishing.
로버트 L애링턴. (2003). 헬레니즘 시대의 윤리학. , 로버트 L애링턴, 서양윤리학사 (페이지: 159-202). 서광사.
롱A.엔소니. (2000). 스토아주의. , 롱A.엔소니, 헬레니즘 철학 (페이지: 205-366). 서광사.
호센펠더말테. (2011). 스토아학파. , 호센펠더말테, 헬레니즘 철학사 (페이지: 103-236).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