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6월 26일 노래 황제 서거
원래 이름은 최창수였다. 그런데 진주 강씨 집안에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의 일원이 되면서 강문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초년 시절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게 안락하게 살지는 않고 일본과 조선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노래에 천부적 재질이 있었던 강문수는 1935년 가수로 데뷔한다. 그의 첫 노래는 일본과 조선 사이를 가르는 바다 현해탄을 배경으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눈물의 해협>이었다. 그러나 원체 무명 가수여선지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노래를 취입한 음반사가 좀 영세했던 측면도 있었다. 세 옥타브를 넘나들면서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 가능성 있는 가수는 첫 노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목을 받는다. 일류 레코드사였던 OK레코드사는 강문수를 스카우트하고 새 노래를 취입하는데 이때 작곡가 강사랑이 강문수에게 참신한(?) 예명을 선사한다. ‘남인수’였다. 창수에 문수에 인수. 어지간히 수자 돌림과 인연이 많았던 이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마~~~~는”
우리 시대의 조용필을 ‘가왕’이라 부르거니와 남인수는 한국 가요의 ‘황제’로 곧잘 표현된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그의 목소리는 여러 노래에 실려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눈물보를 자극했다. <낙화유수> <가거라 삼팔선> <무너진 사랑탑> 등등 많은 노래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그의 노래는 단연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이 노래를 불러 본 사람은 알겠지만 비슷한 분위기의 <굳세어라 금순아>보다 두 배는 더 부르기 어렵다. 한참 낮게 내려가서 보통 사람은 음도 짚기 어려운 멜로디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후반부에는 솟구치는 “판자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대목을 소화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줄기차게 이 노래를 불렀다.
밤의 부산항에 원조물자를 싣고 들어온 외국 배 선원들은 세 번 놀랐다고 한다. 전쟁 중인 빈국 같지 않은 스카이라인(?)에 놀라고 다음날 일어나보니 그게 빌딩이 아니라 산중턱까지 빽빽이 들어찬 판잣집의 호롱불들이었음에 놀라고, 원조 물자 하역한다고 새카맣게 몰려든 사람들 숫자에 기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곳에 피난을 와서 갖은 고생 다하다가 모처럼 정분난 경상도 아가씨와 짧은 사랑을 나누다가 경부선을 타고 서울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던 남자들은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잘 가세요 잘 있으시오 이별의 기적이 운다”라기보다는 “잘 가이소 잘 있으소”가 맞을 것이다.
별안간 들이닥친 피난민들에게 그리 살갑지는 않았던 부산 인심이었다. 전라도 충청도 사투리를 쓴다고, 심지어 서울말을 쓴다고 눈총과 업신여김을 받았을 그들에게 피난 살이는 한많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기적 소리 은은히 들려오던 영도 산자락의 판잣집의 추억을 잊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영화는 속편이 별로인 것이 불문율이지만 노래 가사는 2절 3절로 갈수록 의외로 좋아진다. 이 <이별의 부산 정거장> 3절도 그렇다.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싶은 말 한마디를 유리창에 그려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 두자 봄소식을 전해주소서 / 몸부림 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전쟁 당시 부산역
슈퍼스타 남인수를 사모하여 몸부림치는 여자들은 무지하게 많았다. 남인수는 슈퍼스타답게 여성 편력도 화려했는데 우선 선배 가수라 할 이난영과 죽을 때까지 함께 했던 일은 유명하다. 남인수에게 본처가 있었지만 이난영은 공식적인 그의 아내 노릇을 했다. 또 한 명 유명한 여성이 남인수와 썸싱이 있었는데 그녀는 다름아닌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이다. 그녀는 처녀 시절 남인수와 마주친 후 불꽃이 일었고 남인수도 그를 알아봤던지 ‘둘만의 시간’을 청한다. 그리고 역사가 이뤄지려는 찰나 한 순경이 뛰어든다. 그 순경은 공옥진의 아버지가 정한 정혼남이었다. “남의 약혼자한테 지금 뭐하는 짓이오?” 천하의 남인수도 약혼자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고 공옥진과의 사랑은 한참 뒤로 미뤄진다.
가요계외 황제로 산 것 같지만 그에게도 역사의 아픔은 있었다. 형은 월북했고 그 딸이자 남인수의 조카 최삼숙은 삼촌과 같은 명가수로서 북한의 한 시절을 풍미했던 것이다. 남인수는 평생 그 소식 하나 제대로 듣지 못하고 아니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한 세월을 보냈다 유명 작곡가가 월북했다고 그 노래 자체가 금지되고 엉뚱한 이들의 이름을 빌려서야 세상으에 나올 수 있었던 사연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일제 시대 친일 노래 몇 곡을 부른사연으로는 죽은 뒤가 피곤했다. 친일파로 지정돼 그의 이름을 딴 가요제조차 중단됐으니.
1962년 6월 26일 한국 가요계의 황제라 할 남인수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