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7월 3일 우리들의 권양, 우리들의 나라
1985년 봄,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권인숙,. 그녀는 ‘현장 투신’ 겸 ‘위장취업’ 1년 뒤 주민등록증 위조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된다. 그리고 죽어도 잊지 못할 끔찍한 순간에 직면한다. 담당 형사였던 문귀동에게 말로 표현하기조차 끔찍한 성고문을 당한 것이다. 경찰 신분증 목에 건 그 개새끼가 어떤 식으로 권인숙을 대했는지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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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웠던 극한의 기억에 괴로워하던 권인숙은 마침내 자신이 당한 일을 세상에 밝히고, 이미 사람의 도를 넘어 버린 정권과 그 하수인의 만행을 고발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조영래 변호사 등이 치를 떨며 작성한 고발장은 글자 그대로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태풍의 눈으로 인천지검에 제출된다. 1986년 7월 3일이었다.
처음에 검찰은 꽤 의욕을 가지고 수사에 나선다. 안기부와 경찰 등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압력이 심하자 지검장이 검찰 출신의 실력자였던 박철언에게 사정을 고하고 실체적 진실을 밝히겠노라고 도움을 청할 정도였다. 박철언도 이에 오케이를 했고 지원 사격을 했다. 하지만 사건의 충격파를 짐작하고 있던 안기부 , 그리고 가해자가 소속된 경찰은 목숨을 걸고 이 사건을 은폐하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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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도 소용없었다. 지검장 김경회는 검찰총장 서동권에게 불려간다. 총장은 장세동이 주재하는 관계기관대책회가 제시하는 수사 결과를 알려 준다. “수사 발표문이든 보고서든 성고문의 성자도 나오면 안된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을 것이다. 수사 내용은 완전히, 그리고 창의적으로 뒤집힌다. 수사에 참여했던 검사가 지검장 방에 들어와 통곡을 했고 지검장도 문을 잠그고 울었다. “검사가 소설을 써야 하는 드러운 세상!” 을 한탄했는지도 모른다. 지검장은 자신이 직접 발표하라는 명령만은 거부한다. 지검장은 자신의 대역을 해야 했던 검찰 간부에게 “못할 짓을 시켰다,”고 미안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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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장 못할 짓을 당한 이, 그리고 검찰이 그 머리를 사타구니 사이에 끼우고 미안해해야 할 대상은 권인숙이었다. 수사력보다는 상상력이 뛰어나고, 판단력보다는 문예창작능력이 걸출하기로 정평이 있던 대한민국 검사도 읽기를 수치스러워한 그 발표문에서 권인숙은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한” 흡사 철혈마녀로 둔갑했던 것이다. 그리고 문귀동은 기소유예되고 권인숙은 공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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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싸움을 보면서 사실은 이때 생각이 났다. 경찰의 전성기는 5공 때였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나 성고문 사건 등 경찰이 사고를 칠 때마다 검찰은 경찰의 압력(?)에 직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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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몇 천명이 12만 경찰을 상대하겠다는 거냐?”라는 협박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위에서 봤던 것처럼 경찰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검사들이 대성통곡을 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건 전두환이 정권 유지의 도구로 검찰보다는 경찰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이고, 그 형 전기환이 경찰 출신으로서 이른바 용산 마피아의 대부였던 탓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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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때 경찰이 보여 준 전횡을 기억하면 그에 대한 반성 제대로 없이 '민중의 지팡이' 이전에 '정권의 몽둥이' 기능을 자임했던 경찰과 왕년의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자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면서 그 나쁜 습관은 고스란히 이어받은 검찰은 한 평범한 여성을 “성까지 혁명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마녀로 둔갑시킨 공범이었다. 그 추악함이 드러나기 시작한 날, 1986년 7월 3일이다.
죽음같은 공포와 죽음보다 더한 수치심에 시달리던 권인숙이 성고문을 포함한 모든 사실을 밖에 알리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극렬히 반대한 것은 가족과 변호사였다.. 우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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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이런 일을 털어놔봐야 여자인 네 인생에 금가는 것이니 그냥 입 닫고 있으면 기소 유예 정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설득했고 심지어 이런 편지까지 보낸다. “"네가 그것을 계속 문제로 삼고 나온다면 부모님이 아마 돌아가실 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내가 너를 죽여 버리겠다" 이 편지를 보낸 사람도 여자였다. 아버지는 끝까지 딸에게 짐승같은 경찰을 고발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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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해도 도무지 말이 안된다. 하지만 그런 시대였다. 그만큼 ‘나라’에 대한 공포는 컸고, 딸이 그 지경을 당했어도 어떻게든 덮고 넘어가는 것이 현명하던 시절이었다. 말이 안되는 시대. 도무지 말이 말같지 않은 시대. 말을 하려 해도 말문이 막히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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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천인공노할 사건도 금새 세간의 관심사로 떠오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자가 그런 걸 까발리는 걸 보니 진짜 당한 게 아닌갑다.”하는 해괴한 논법이 통하는 사회였고 옛날에 과격했던 여성 빨치산들을 떠올리며 “진짜 독한 것들”이라며 혀를 차는 사람이 더 많은 나라였다. 이 참극 앞에 떨쳐 일어나야 마땅했던 학생운동권은 자민투와 민민투의 노선 투쟁 가운데 각목 싸움까지 벌어지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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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안되는 상황을 깨뜨린 것은 여성들이었다. 남학생들과 똑같이 세미나하고 데모하고 졸업하면 노동자가 될 생각으로 날을 지새던 여학생들에게 권인숙은 강 건너 불이 아니라 팔뚝에 꽂힌 불화살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결코 남의 일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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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참지 못한 일부 여학생들은 남학생들도 꿈을 꾸지 못할 일을 벌인다. 화염병 몇 개 던지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인천지검 현관에 신나를 뿌리고 방화를 기도한 것이다. 고려대 여학생 3명이었다. 한 명은 화상을 심하게 입었지만 검찰은 치료도 시키지 않고 구속시킨다. 그 더운 여름에. 화상 입은 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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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무위에 그칠 뻔 했던 명동 시위를 폭발시켰던 것은 서울대의 한 여학생이었다. 명동성당에서 예정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그녀는 하루 전날 명동 성당에 숨어들어와 화장실에서 밤을 샜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는 완강했고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경찰의 최루탄과 몽둥이에 대오가 흩어지려는 찰나 성당 화장실에서 밤을 새며 동료들을 기다리던 키 150센티미터의 여학생이 대오의 앞장을 섰다. “성고문 자행하는 군사독재 타도하자.” 지극히 바른 말. 당연한 말. 그러나 꺼내기 어려웠던 말이 가장 약해 보이는 사람의 입에서 울려 퍼지고 터져 나오면서 시위는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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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던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말이 안되는 일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고 얼토당토 않은 말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되느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이제 그들은 조영래 변호사의 눈물 어린 항변에 공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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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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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며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리고 저들은 무슨 일을 했던 것인가. 그 말이 안 되는 시대, 성고문을 당하는 이의 언니가 “너 경찰을 고발하면 부모님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동생에게 울며 매달려야 했던 그 공포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말했고, 일어났다. 담벼락에 욕만 한 게 아니라 신나통을 들고 검찰청에 들이부었고 시위에 참석하려고 성당 화장실에서 밤을 지샜다. 말이 안 되는 짓을 자행하는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악을 쓰고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대들던 에너지. 그게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이 지닌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