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고 폰을 만지작 거리며 뉴스거리들을 읽어보는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건 실검 1위 김생민 이었다. 그 이름을 따라 줄지어 올라오는 단어들. 김생민 성추행, 김생민 미투, 미투... 또 터질것이 터진것이다.
예전부터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을 한번 보고싶었다. 그때는 미투 운동이 한국에도 번지기 전이었는데 도서관에서 대여하기가 힘들었다. 대기를 걸어놓은 사람이 워낙 많았고, 그 이후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도 이책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지난주 광화문 교보에 가서 책을 검색해보니 재고가 300개가 넘었다. 결국 가장 빨리 이 책을 볼 수 있는건 서점이었다. 그리고 오늘 반디앤루니스 바닥에 앉아 두시간도 안돼 책을 다 읽고 왔다.
생각했던것보다 심도있고 무게감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 빠른 속도로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는 몰입도 있는 책인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김지영씨와 나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 않는다. 그냥 대학 선배쯤 될 법한 나이의 김지영씨. 그래서인지 나도 비슷하게 겪은 부분들이 상당하 많았다.
- 김지영은 학창시절 학원 수업이 끝나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옆에 서있던 남학생이 인사를 하며 말을 걸어오고 그 남학생은 집으로 데려다 줄까요?라는 말을 한다. 김지영이 네? 라고 되물으니 그 남학생이 아까부터 집으로 데려다달라는 눈빛을 보내지않았냐고 말한다. 김지영은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자 그남자의 눈치를 보다 마지막 문이 닫히기 전 급히 버스로 올라탔다. 그러나 그새에 남학생도 같이 올라탔고 김지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이 하얗게 질린채로 겁에 떨며 버스 손잡이에 의지한채 가고있었다. 그때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학생 어디 아프냐며 김지영에게 자기 자리를 양보해주고, 김지영은 그 여자에게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펴서 전화기 모양을 만들며 다급하게 신호를 보낸다. 그 여자는 자신의 휴대폰을 빌려줬고 아빠에게 빨리 버스정류장으로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다급한 문자를 보낸다. 어디서 내릴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늦은 밤 외딴 동네에 내리는것보단 그냥 원래 내려야 할 곳에 내리자 맘을 먹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그 남학생도 따라 내린다. 김지영은 맘속으로 아무일도 없을것이라고 되새기며 걸어가는데 그 남학생이 자기에게 호감을 보내왔으면서 왜 이제와서 자기를 치한처럼 취급하냐고 말을 한다. 김지영이 네? 하고 되묻자 학원에서 자기 앞에 앉아 프린트 건네줄때도 살짝 웃으며 주고 파일도 주고 했으면서 왜그러냐고 묻는다. 그때 학생~~~! 학생!!! 하며 자리를 양보해줬던 여자가 스카프를 들고 뛰어오며 “이거 놓고내렸어요.” 한다. 분명 학생들이 맬 법한 스카프는 아니다. 남학생은 쌍욕을 하며 그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아빠가 허겁지겁 버스정류장으로 뛰어오고 상황을 들은 아빠는 김지영에게 저런 말을 한다.
옷울 잘 챙겨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도대체 김지영씨가 잘못한게 뭔데...? 이 일 이후로 김지영씨는 학원을 그만두고 버스정류장에서는 낯선이들을 경계한다.
여자로 살면서 나도 남자들에게 약자가 되어야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정상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맨처음 바바리맨을 만난건 초등학교 4학년때.
교회를 가던 길이었고 바바리맨을 목격한 후 너무 놀란 나는 정말 발에 모터가 달린 사람처럼 교회까지 쉬지않고 미친듯이 달렸다.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였는데 진짜 100미터 달리기 기록을 재는 것 처럼 달렸다. 그 이후로도 몇번 바바리맨을 만났는데, 제일 무서웠던 건 고3때 만난 미친놈이었다.
나는 수시로 대학을 합격한 상태였고, 4교시만 마치고 다른 공부를 하러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이동중이었다. 그 시간 교복을 입은 사람은 그 칸에 나밖에 없었고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가고있는데 어떤 남자가 내 옆에 서서 몸을 비스듬히 돌려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속으로 ‘뭐지? 뭐지?!’ 생각했고 겁에 질린채 동요하지 않는 척 앞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비스듬히 서서 나를 바라보며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무서웠다.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아무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완전 패닉 상태였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부분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난 교복을 입고 있는 19살이었는데...그 누구도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일을 당하면서 군중속에서 난 혼자였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겉으로는 태연한척 그 또라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앞만 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그냥 다음 역에 무작정 내리자! 생각했다. 다음역에 대한 안내방송이 나오고 나는 자연스럽게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에 비친 내 모습 뒤로 그 남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너무 무서웠다.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자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그런데 젠장...! 그 역은 남태령 역이었다. 혹시 남태령 역을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것이다. 그 곳은 정말 인적이 드문 곳이다. 주변에 군부대가 있고 역이 엄청 깊게 뚫려있다. 이곳에 내린다고해도 갈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 나는 순간 내가 여기 내려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내 뒤까지 따라온 이상 그곳을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문이 열리자마자 초등학교 4학년때 바바리맨을 만났던 날처럼 미친듯이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올라갔다. 뒤도 돌아보지않고 달렸다.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정말 에스컬레이터도 너무 길고 계단도 오지게 많은 곳이었다. 아무 출구로 무작정 뛰어 나오니 따뜻한 햇살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봤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날 나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남태령에서 사당역까지 걸어갔다.
(학창시절 나는 이런 일을 몇번 겪어봤다. 그런데 이런 변태같은 인간들을 만나본적이 없는 친구들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모든 남자들을 폄하하거나 비정상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 또라이인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성 앞에서는 여자가 약자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요즘에도 누군가 나를 쫓아오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럴땐 티나지않게 스윽 그사람을 확인하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돌아 간다. 아니면 그사람과 걸어가는 템포를 다르게 하기 위해 갑자기 가방안에서 뭘 꺼내는척 하면서 시간차를 만들거나 편의점으로 들어가거나 한다. 그러나 간혹 정말 그냥 지나가는 행인이었던 경우도 많다. 많은 남자들이 억울해 하는 부분이다. 김지영씨를 도와줬던 여자가 했던 말처럼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다.
- 김지영씨는 회사 신입시절부터 팀장에게 칭찬받는 일 잘하는 사원이었다. 회사 내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한 기획팀을 꾸리는데 김지영씨도 당연히 지원했다. 하지만 동기들 중에서는 남자동기들만 선출되었고 나중에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자사와 오래 갈 수 있는 인력들을 원했고 당연히 남자직원들을 회사에서 미는 인력팀에 넣는 것이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시절 인턴과 여러 사회경험을 쌓고 맨처음 회사에 취업을했다. 내가 원했던 분야의 일이었고 급여가 낮은것은 이미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업무강도가 셌다. 첫 출근했던 주에만 8시 안에 퇴근을 한것 같다. 그 이후로는 12시 넘어 퇴근하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그냥 나의 퇴근 교통수단은 택시뿐이었다. 새벽 두시쯤 엄마가 왜 안오냐고 전화하면 나의 대답은 “회사야~ 신경쓰지말고 얼른 자.” 라고 말하는 때가 많았다.
나는 그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특이 케이스로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몇년 차 선배들도 현장 경험이 두세번이었는데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현장 파견을 많이 나갔다. 그때 나를 잘 챙겨주던 선임이 다음 프로젝트에 나를 데려갈 것 처럼 늘상 얘기해왔고, 너의 다음 업무는 나와 함께하는 그 프로젝트일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팀원을 선정할때 그 선임은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 직원을 데려갔다.
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다. 그 선임은 그 이후로도 나에게 종종 미안함을 표현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한번씩 농담삼아 “선배는 나를 버렸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그러더라. 나를 데려오고 싶었는데 PM(프로젝트 매니저)이 이건 3년짜리 프로젝트인데 나보다는 남자직원을 데려오는게 오랫동안 일하기에 낫지 않겠냐 라고 몇번 얘기해왔다고.
그런데 더 열이 뻗쳤던 일이 있었다. 나중에 회사를 관두고나서 친했던 동기,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알게 되었는데 그 남자직원들은 애초에 일을 시작할때부터 우리와는 급여 자체가 달랐다고 한다. 심지어 그들은 나의 후배였는데 남자라는 이유로 우리보다 초봉이 더 높았다. 그때 나는 와 진짜 세상 더럽다... 라고 생각했다. 내가 거기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출장길에 공황장애와서 호흡곤란까지 겪고, 자면서는 환청에 시달리고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쓰러지고 그러면서도 회사에서는 새벽 두세시까지 일하고 그랬는데... 나보다 뒤늦게 들어온 남자 직원들이 나보다 많은 월급을 받고 있었다.
그곳을 나온건 정말 탈출 같았다. 평소에도 그 회사운영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진짜 사장 마인드 썩었구나 뼈저리게 느꼈다. 기획회사여서 심지어 여자 직원이 월등히 많았는데 여자를 위한 복지는 단 하나도 없으면서 남자라는 이유로 월급부터 달랐던 것이다.
서점에 앉아 빠른 속도로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내용 자체가 엄청 흥미롭거나 마치 타임슬립을 주제로 하는 책들처럼 읽을수록 그 책에 매료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지영씨가 겪은 모든 에피소드들이 나에게도 다 있었던 일이다.
이 책에 대해 참 말이 많더라. 이 책을 읽은 아이돌은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듣고 인터넷 댓글들 중에는 별 일도 아닌것을 엄청 페미니즘에 맞춰 써내려갔다는 말도 있단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나도 여태껏 다 겪었던 일이다.
여성부가 가끔 지나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며 주장하느라 욕먹는것에 대해서는 나도 같이 부정적인 편에서 여성부를 바라본다. 그리고 세상에는 더 좋은 남자가 많다는 말에 공감한다. 지하철에서 나는 또라이같은 변태를 만났지만, 출퇴근길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대중교통 안에서 남자들이 겪는 고충들도 다 안다. 남자들이 흔히 말하는 역차별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생민의 인기를 응원했었다. 그의 방송인생이 마치 우리네 회사원들처럼 꾸준히 하나씩 차곡차곡 모아가며 불안정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온 것 같아 내심 동질감도 느꼈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 마저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왠지 이명박이 구속 뉴스가 많아지면서 미투 가해자들에 대한 뉴스는 잘 안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요 몇일 했었다. 김기덕, 조재현은 어찌 된 것이며 남궁연도 이대로 끝인건가. 그들은 어디서 뭐하고 있는건가. 그냥 이대로 몇년간 잠적하고 있다가 몇 년 후 또 방송에 얼굴 내미는 게 아닐까... 그런데 오늘 김생민의 10년 전 사건이 터졌다. 다른 미투 사건이 터졌을때와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 김생민 왜그랬을까... 김생민 마저도 왜...'
안희정 뉴스를 보면서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인으로서의 삶이 검찰 수사 등과 땔 수 없는 업이긴 하지만 수많은 사건들 중에 성추행 사건으로 저렇게 구속수사 받고 구설수에 오르는게 참 안타깝더라. 한사람의 인생으로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번 김생민도 마찬가지고. 가끔 티비에 나오는 김생민의 어수룩한 모습과 잘나가는 후배 개그맨들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어설프지만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서야 빛을 발하는 그의 방송생활을 응원했는데... 10년전 우리네 회사원처럼 일하는것 같았던 김생민도 회식자리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었다니...
여자의 약함을 주장하며 우대받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인드가 남자들이 흔히 말하는 역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일테고 그건 우리가 주장하는 성평등이 아니다. 그런데 아직도 '성'적인 면에서는 여자들이 약자임은 분명하다.
올해 20살이 1999년생들이다. 99년생 여자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대학생활에서 그리고 더 넓은 사회로 나아갔을때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까? 82년생 김지영씨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남여가 사회에서 뭐가 그리 다르고 도대체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권력을 앞세워 본인의 욕망을 채우는지 모르겠다. 이번 사건들을 통하여 남여 서로가 인간으로서 서로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었음 한다.
오늘의 주저리주저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