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대나무숲
어제 나의 좋은 이웃 님이 일기를 썼다.
그래서 플래너를 샀다. 프랭클린 플래너. 비싸더라. 저번 주에 만난 친구가 11년째 이걸 쓰고 있다고 해서 당장 샀다. [...] 그리고 빈 칸에는 짤막한 일기를 몇번 써 봤다. 그런데 이거 해방이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될 유치찬란하고 오글거리는 짤막한 글쓰기가 이렇게 좋은 것일 줄이야. 여기가 대나무숲이네. 당분간, 아니 오래오래 플래너를 쓸 것만 같다.
그래, 나도 대나무숲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님처럼 플래너에 내 언어를 해방시키기에는, 손이 둔해 펜을 쥐고 종이에 글을 적는 행위가 무척이나 번거롭다. 그리고 어느정도는 관심 종자의 기질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은 무언가 싱겁다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나는 이 스팀잇 블로그 공간을 대나무숲 삼아 글을 하나 끄적여 볼까 한다. 어차피 님 같이 거의 실명을 공개하고 쓰는 블로그도 아니고, 익명으로 활동하는 곳인데, 내 마음을 조금 쏟아낸들 어떠하랴. 본래 나는 내 블로그에 잡다한 주제의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정도는 예외로 해두고 싶다.
빨갱이, 그놈의 빨갱이
이제 내가 소리칠 내용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그동안 여러모로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어왔고, 친구들과 자조적으로 서로 빨갱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당연히 스팀잇에도 나를 빨갱이라는 원색적인, 말그대로 원색적인 비난을 할 사람들이 있으리라. 어제 올라온 님의 글에서도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었다.
어디선가 스팀잇은 '좌파들의 블록체인'이라며 '능력도 없고 할 것도 없는 이들이 남탓 하며 좌빨질 하는 곳'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들의 기준에서라면 나는 곧 '좌빨질'을 시작할 것이다. 이 선언은 글을 쓰는 이가 글을 읽는 이에게 보내는 일종의 배려이다. 뻔히 보는 빨간 글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더 이상 읽지 않고 뒤로 돌아갈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반발의 감정이 끓어오르기 전에 여러분은 여기에서 멈출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스스로를 빨갱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나는 어떤 급진적인 사회를 희망하는 혁명가였던 적이 없다. 부르주아를 때려잡아 프롤레타리아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고,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해 축출해 내야한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다. 다만 사회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닳고 닳아 무뎌진 감수성을 아직은 가지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아직은 조금씩 앞으로 더 이상(理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을 뿐이라 생각한다.
이디오크러시
2006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 『이디오크러시』는 사회풍자적 내용으로 유명하다. 주인공인 조 바우어(루크 윌슨 扮)는 모든 지표가 평균적인 인간으로서 냉동 수면 실험에 참가하게 되고, 이 실험이 잘못되면서 500년 뒤에 깨어난다. 똑똑한 사람은 아이를 낳지 않고, 멍청한 사람은 아이를 많이 낳으며, 500년 뒤의 인류는 지적으로 퇴행한 상태였다. 조 바우어는 일약 인류를 구원할 천재로 떠오른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은 조 바우어에게 토지의 황폐화와 그에 따른 식량난 문제를 맡긴다. 그는 백악관에서 탈출하여 도망가던 중 이 식량난의 원인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식물에게 물이 아닌, 브라운도라는 이온음료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황당한 이 광경에 바우어는 장관이 되어 토양에 물을 줄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이디오크러시』의 해학이 등장한다. 바우어의 정책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 반대 집회를 시작한다. 브라운도를 생산하는 기업은 미국 사회를 떠받히는 독점 대기업이었고, 바우어의 조치에 기업의 주가가 하락하며 수많은 실직자가 양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브라운도로 작물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결국 주인공이 옳았음이 증명되며 사람들의 호응을 받으며 마무리 되지만, 정상과 비정상의 대립이 보여주는 아찔함은 우리의 현실을 절묘하게 풍자한다.
무엇이 비정상인가
그제는 님이 적은 요즘 경제 돌아가는 상황을 들었다라는 글을 보았다. 후배와 나눈 대화를 일기처럼 적은 글이었다.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최악의 상황이라고 한다. 신문에서 본 이야기지만 실제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 들으니 더욱 실감이 갔다.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최저임금 때문이라고 한다.
최저 임금이 올라가면서 아르바이트를 쓰는 가게들이 매우 어려워졌단다. 그래서 고용하는 사람의 숫자를 줄이고 고용시간도 단축한다고 한다. 식당의 경우 점심때 문을 열었다가 다시 몇시간 동안 문을 닫고 다시 저녁에 문을 여는 식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24시간 편의점들도 이제는 야간에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 늘어나고 있단다. 예전에는 본사에서 24시간 영업을 요구했으나 이제는 편의점들이 사정상 하기 어렵다고 하면 받아 준다고 한다. 인건비가 비싸서 잘못하다가는 폐업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 지금까지의 최저임금인상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받은 계층은 개인사업자들이었단다. 그다음에는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개인사업자들은 3명하던 아르바이트를 2명으로 줄이고 10시간 쓰던 것을 4시간씩 두번 나누어 고용한단다. 그래서 그런지 4시쯤 갑자기 김밥먹고 싶어서 나갔더니 문을 닫았다.
결국 최저임금인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후배의 결론이었다. 저는 과거에 최저임금 좀 올리라고 핏대를 세웠던 적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주변에 이러한 생각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최저임금 상승이 가져오는 효과에 대하여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주장하는 직접적인 수익성의 타격이 실재한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주장에서 『이디오크러시』의 반대 집회 장면이 겹쳐 보인다. 과연 무엇이 비정상인가? 농지에 물이 아닌 이온음료를 부어 작물을 망치는 것이 비정상인가, 아니면 이온음료의 용수를 막아 이온음료 사업에 얽힌 수익성을 망치는 것이 비정상인가?
물가상승률을 따르지 못하는 임금상승률로 심화된 부의 양극화와 너도나도 뛰어든 자영업으로 갈라진 파이 조각, 노동자가 아닌 임대업자가 꿈이 된 세태, 낮은 인건비로 쉽게 24시 운영이 가능한 것이 비정상인가, 아니면 최저임금이 올라 자영업자의 수익이 줄어드는 것이 비정상인가?
원인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최저임금 때문이 아닌 높은 임대료와 비정상적으로 많은 자영엽 경쟁자 때문이라고 말해야 옳지 않은가. 왜 자신이 착취하는 개인은 조정 가능한 변수로 취급하면서 자신을 착취하는 개인은 변화시키면 안되는 상수로 취급하려 하는가.
나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으로 이에 대비하기 어려운 소상공인의 피해를 최소화 해야하며, 부동산 가격의 연착륙와 아울러 조화롭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같은 목적 의식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적극 공감할 수 있지만, 다짜고짜 최저임금의 상승을 문제로 지적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정상을 심화시키는데 일조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결코 공감할 수 없다.
대체 무엇이 비정상인가. 우리는 이 비정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 안되는걸까.
지금 나는 대나무숲 안에서 나의 목청을 높이고 있다. 나는 소리만 지르고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대나무를 깎아 죽창을 만들 것인가. 여기서 하나의 새로운 고민을 남기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