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덕질하는 피라미 쏭블리입니다. :)
저는 시험을 끝내거나 바쁜 시기를 보낸 뒤 스트레스를 풀 때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드라마를 몰아서 봅니다. 뇌의 시동을 끈 채, 완전히 수동적인 여흥 을 즐기는 거죠. 즉, 제게 대부분의 드라마는 머리를 쉬게 하기 위한 킬링타임용 제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방되지 않은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 가 뜨는 순간부터 1주일 내내 줄거리를 곱씹으며 기다리다니.. 참을성 없는 저에겐 최악입니다. 그런 제가 요즘 본방에 재방까지 보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극본: 김은 / 연출: 안판석 / 주연: 손예진 정해인
이 드라마는 철저히 제 나이대의 여성 시청자를 노린 작품이며, 현재로서는 꽤 성공적입니다. 한한령이 풀리지 않은 중국까지 벌써 들썩들썩 하는 데다가, 여기 저기서 드라마 앓이로 고생중인 분들이 있더군요. 저도 첫 회에 넘어갔습니다. 목표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당했다니-_-, 제 스스로도 그 이유가 궁금해져서 곰곰히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여자’들의 꿈이다.
처음 제목을 들은 순간, 제목 참 잘 지었다 생각했습니다. 햇님군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남자들이 좋아하겠네.” 라고 했지만 전 다르게 생각했죠. 이 제목이야말로 수많은 골드 미스 여성들의 꿈을 고스란히 담아냈다고.
밥 잘 사주는 = 경제적 능력이 있는 여자
예쁜 = 자기 관리를 잘 한 여자
누나 = 주변에 나를 (이성적인 의미로) 누나라고 불러줄 남자가 있는 여자
30대가 되며 한 해 한 해 달라지는 체력과 외모, 그에 비해 딱히 부응하지 못하는 경제적 여유, 남자는 커녕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조차 힘든 빠듯한 직장 생활. 현실은 팍팍합니다. 그 속에서 경제적 능력과 외모, 로맨스를 모두 잡고 싶어하는 누나들의 꿈을 제목 하나로 표현한 것이죠. 이 얼마나 뛰어난 네이밍 센스인지! 안판석 감독의 감각을 다시 한 번 느낀 대목입니다.
현실에서 너는 손예진이 아니고, 네 남편(남친)은 정해인이 아니야.
요즘 네이버에서 드라마 제목을 치면 TALK 이라는 공간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드라마에 관한 의견을 실시간으로 올립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이하 예쁜 누나) 의 TALK을 보면 간혹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결국 너는 현실에서 손예진이 아니고, 니 남편(남친)은 정해인이 아니다. 맞는 말입니다. 일단 저부터 손예진과 저의 유사점을 찾으라면 마지막 염색체가 xx라는 것 정도겠죠.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가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보여주어야 한다면 지금껏 나온 드라마와 영화 작품의 1/100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범죄영화 속 살인마의 이야기를 보면서도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하고, 연민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와 동떨어진 상황에 있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감정과 경험의 교집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설사 손예진이나 정해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일방이든 쌍방이든 사랑의 경험이 있습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로 귀가 뜨거워질 때까지 통화를 하고,
문자 하나에 실실 웃기도 하고, 숨 죽이기도 하고,
스칠듯 말듯한 거리에서 서로의 떨림을 느끼기도 하고.
이 드라마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결국 어느 드라마든 시청자와 인물 사이의 경험과 감정의 교집합을 어느 선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가가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가름할 것입니다. 저는 예쁜 누나가 보여주는 사랑 뿐만 아니라 30대 여성 직장인으로서의 불편한 상황들, 상사 및 동료와의 충돌, 가족들과의 의견 차이 등에 큰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에 예쁜 누나에 나오는 표현들이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고, 큰 사건 없는 밋밋한 전개가 지겨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영화 실미도를 보며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죠.
결국 드라마는 하나의 상품이고, 아침드라마, 대하사극, 일일저녁드라마 등 각각의 드라마가 향하는 타겟 소비자는 다릅니다. 저는 30대 여성이라는 하나의 타겟으로서 예쁜 누나가 상당히 노련하고, 치밀한, 고퀄리티의 문화상품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분이라면 분명 이 드라마 곳곳의 함정에 푹푹 발을 잡혀 단골 고객이 되실 겁니다. :-)
사족
정해인도 정해인이지만 손예진은 정말 최고입니다. 저는 소주 마시는 장면을 보면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떠오르고, 비를 맞는 장면이 나오면 클래식이 떠오릅니다. 비와 소주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 여배우. 이 드라마에서도 비와 술은 썸에 한 몫을 하더군요.
심심해서 좋습니다. 레이첼 야마가타가 참여한 OST뿐만 아니라 ‘Stand by your man’, ‘Save the last dance for me’ 같은 올드팝이 은은한 영상과 적절히 어우러집니다. 노래만큼이나 자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그래서 더 좋습니다. 반전과 중상모략이 반복되는 드라마에 지쳐버린 듯 합니다.
어릴 때 본 아들과 딸(1992)에서 김희애는 그 시대에 딸로 사는 것의 애환과 극복과정을 보여주었고, 엄마의 바다(1993)에서 고소영은 X세대의 모습을 그리며 스타가 되었습니다. 내 이름은 김삼순(2005)에서 김선아는 청순하고 착하기만한 여주인공의 틀을 깨고 악착같고, 망가지고, 인간적인 여주인공으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시대별로 기억에 남아있는 여주인공들은 언제나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누가, 무엇으로 남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