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해양제국의 시작 바스코 다 가마
바스쿠 다 가마 (Vasco da Gama 1469년~1524년 12월 24일)
포르투갈의 항해자이며 탐험가다. 1497년~99년, 1502년~03년, 1524년 3차례에 걸쳐 인도로 항해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해안을 거쳐 인도까지 항해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때때로 인도까지의 항로를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인도 항로의 개척으로 인해 포르투갈해상 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해양제국의 시작
땅 끝 마을이다. 유라시아의 극서이다. 오래, 세계사의 변방이었다. 13세기 유라시아를 대일통한 몽골세계제국의 영향도 미미했다. 동아프리카의 기린이 베이징으로 이동하는 몽골식 세계화에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유럽 중에서도 주변이었다. 그나마 동지중해는 활달했다. 서아시아와 밀접했다. 베니스와 제노바는 동방무역으로 번영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다마스쿠스와 긴밀했다. 하지만 지중해의 서북, 리스본은 한적했다. 적막하고 적조한 깡촌이었다.
유라시아의 변방이자 지중해의 변두리였지만, 대서양과 면하고 있었다. 인도양으로 우회하는 항해로도 리스본에서 출발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상징적이다. 비잔틴제국의 수도가 무슬림의 손에 넘어갔다.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 되었다. 이슬람제국 이스탄불의 선진문물이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르네상스를 촉진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로, 중국으로, 아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남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봉을 돌아서야 겨우 인도양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다 바람을 잘못 타서 대서양을 지나게 된다.
대서양(신해양)과 인도양(구해양), 유라시아(구대륙)와 아메리카(신대륙)를 잇는 선봉대가 된 것이다. 리스본이 지구사의 전위가 되는 혁신도시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많은 향신료와 더 맛있는 식도락과 더 큰 이윤에 대한 욕망이 모험과 탐험을 촉발한 것이다.
리스본은 지구촌의 허브가 되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연결시켰다. 이디오피아의 고산과 아마존의 정글이 접속되었다.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허브를 유럽에 전파하고, 교황에게는 코끼리를 선사했다. 아프리카에서 노획한 노예를 아메리카에 팔았고, 그 노예들이 탄광에서 채굴한 은을 아시아에 널리 유통시켰다.
아시아의 상품이 리스본을 거쳐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아메리카의 은이 리스본을 통하여 아시아로 확대되었다. 중국의 차(茶, cha)가 인도에서는 쨔이(चाय)로, 아랍에서는 샤이(شاي)로, 유럽에서는 티(Tea)가 되어갔다. 몽골이 대륙을 평정했다면, 포르투갈은 바다를 섭렵한 것이다. 여태껏 세계사를 이끌었던 육상제국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최초의 해양제국이 발진했다.
해양제국과 식민지
고아에 인도국(Estado da India)을 세운 것이 1505년이다. 해양제국 식민지 경영의 전범이 되었다. 고아를 점령함으로써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페르시아를 잇는 서인도양의 상업망을 장악할 수 있었다. 동인도양은 벵골만이다. 말라카와 스리랑카 너머 중화세계까지 연결되었다.
마카오에 도달한 것이 1514년이고, 나가사키까지 이른 것이 1543년이다. 반세기 후, 임진왜란(1592)이 일어난다. 조총으로 열도를 통일한 도쿠가와 신정권이 반도와 대륙 진출까지 도모한 것이다. 야소교 선교사로부터 중국과 인도, 아랍에 이르는 인도양세계의 고급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하지만 때가 너무 일렀다. 명청 교체를 통하여 중화세계는 복원되었다. 중화세계의 붕괴는 청일전쟁(1894), 300년 이후의 사태였다.
인도에서도 무굴제국은 건재했다. 고아는 델리에 견주자면 변방이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지나 영국에 이르러서야 인도를 완전 정복할 수 있었다. 세포이항쟁과 아편전쟁, 메이지유신까지 3세기의 세월이 더 소요된 것이다. 그럼에도 Estado da India가 '서세동점'의 시발이었다는 의의만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상업과 해군을 결합시켰다. 비교우위에 따른 시장경쟁이 아니라, 군사적 우위에 바탕 하여 시장을 조작했다.
스리랑카의 시나몬도 말라카의 후추도 시장가보다 저렴하게 구매해서 유럽에 독점적으로 공급했다. 인도양세계의 몬순바람을 타고 작동하던 '자연무역'을 대신하여 '자유무역'을 입안한 것이다. 포르투갈을 모방한 네덜란드 역시 동인도회사를 발족시키고 '항해의 자유'(Mare Liberum)를 표방했다. 게임의 룰을 바꿈으로써 무슬림을 배제한 배타적 연결망을 창출한 것이다.
자유무역이 자연무역을 대체함으로써 홍해와 페르시아만은 활기를 잃어갔다. 인도양 연결망이 달라지면서 지중해의 세력균형도, 유라비아(유럽과 아랍)의 역관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바스쿠 다 가마 생애
바스쿠 다 가마는 1460년이나 1469년 포르투갈의 남서부 알렌테주 지방에 위치한 시네스(Sines)에서 지역 사령관이었던 이스테방 다 가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바스쿠 다 가마의 아버지는 1460년 비제우 동 페르난두공 가문의 기사였으며, 시네스의 시민 통치자(Alcaide-Mór)로 지역의 비누생산에 대한 징수권을 가지고 있었다.
카스티야와의 전쟁에도 종군하였으며 선원으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 및 엔히크 왕자의 뜻을 이어 항로 발견을 시도하였다. 1497년 4척으로 된 탐험대는 리스본을 떠나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다음해 5월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이 항로는 '인도 항로'라 불리며 유럽인이 아시아에서 활약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다. 후에 인도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인도 총독이 되었다.
제1차 항해
바스쿠 다 가마의 첫 번째 항해
1497년 7월 8일 4척의 선대와 170명의 선원을 인솔하고 리스본을 출범하였다. 도중까지 동행한 디아스의 조언대로, 시에라레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혁명적 항법을 써서 약 3개월간 육지와는 떨어진 약 9600km의 원해를 항해하여, 11월 희망봉을 돌아 그해 12월 16일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배를 돌렸던 그레이트 피시(Great Fish) 강을 지났다. 아프리카 대륙 동해안을 북상하여 모잠비크·몸바사를 통과, 1498년 4월 마린디에 도착하였다. 그의 함대는 1498년 5월 20일 캘리컷(Calicut)에 도착하였다.
귀국행
1498년 8월 29일 인도를 출발하여 1499년 1월 7일 말린디(Malindi)에 도착하였다. 몬순의 영향으로갈 때는 23일 걸린 인도양 횡단을 올 때에는 132일이나 소요하였다. 이 항해기간 동안 선원의 반을잃었고, 나머지 선원들도 괴혈병에 시달렸다. 그의 함대 중 2척의 배만 1499년 7월과 8월에 도착하였다. 바스쿠 다 가마는 함대와 떨어져 조금 더 늦은 9월에야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마누엘 1세(Manuel 1)는 그와 그의 형제 자매들에게 "Dom" 이라는 작위를 하사하였고, 그 작위의 세습을 허락하였다. 또한 그에게 "인도양의 제독(Admiral of the Indian Seas)"이라는 명칭도 주었다.
제2차 항해
1502년 2월 12일 바스쿠 다 가마는 20척의 군함을 이끌고 인도로 향한다. 이는 그가 첫 항해 후 남겨두고 온 포르투갈인들이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보복성 조치였다. 그는 인도 북부에서 메카에서 돌아오는 아랍 상선인 miri호를 잡아, 타고 있는 상인들과 함께 불태워 버렸다. 그 외에도 그의 함대는 아랍 상인들의 배를 상대로 해적질을 했으며 캘리컷에서 29척의 아랍 함대를 격퇴시킨다. 이를계기로 1502년 10월 30일 Zamorin과 쉽게 무역 협정을 맺는다. 함대는 1503년 7월 귀국한다.
제3차 항해
1519년 그는 왕가의 피가 안 섞인 사람 중 최초로 Count of Vidigueira 가 되어 백작 작위(count)를 받았다. 1524년 인도 통치를 담당하는 Eduardo de Munezes의 무능함으로 인해 그를 대신하기 위해 바스쿠 다 가마가 파견된다. 하지만 고아(Goa)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1524년 12월 24일 코친(Cochin)에서 숨을 거둔다.
항해왕자 엔히크(1394년 3월 4일~1460년 11월 13일)
포르투갈 제국 초창기의 주요 인물이다.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나가는 항해로를 개척하는 것을지원하였다. 포르투에서 아비스 가의 시조 주앙 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엔히크는 아버지 주앙 1세가 1414-15년에 지브롤터 해협 너머 북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무슬림 항구도시 세우타를 함락시키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젊은 엔히크는 세우타를 종착 기지로 하는 사하라 무역로의 번영을 직접 보고 이슬람권 너머 어딘가에 군림한다는 사제왕 요한에 대한 전설도 들으면서 아프리카라는 대륙, 그리고 포르투갈의 무역을 확장하는 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415년 북아프리카의 회교도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으며, 1418년 이후 아프리카 서해안에 많은 탐험선을 보내어 항로를 개척하기에 힘썼다. 그는 세인트빈센트 곶에 천문대와 항해 연구소를 세웠으며, 탐험 항해가들을 파견하여 마두라·보자도르 곶·베르데 곶 등에 닿게 하였다. 1446년에는 북위 약 15°에 있는 감비아 강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인도 항로를 발견할 수 있는기초를 마련하였다.
엔히크는 사그르스의 ‘빌라 두 인판트(Vila do Infante, 왕자의 마을)’에 항해가와 지도업자들을모아 이들의 후원자가 되어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 수 있게 하였다. 이 사그르 학파는 항해학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그들의 여러 발견은 엔히크의 형의 손자인 주앙 2세 때인 1481년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크게 확장하게 되는 기반을 다졌다.
대항해시대
세기 후반부터 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배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하던 시기를 말한다. 그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했던 아메리카 대륙과 같은 지리적 발견을 달성했다. 이 시기 이전에 정화의 대항해 등, 해상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유럽인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편협한 용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아메리카의 발견은 블루베리, 카카오, 옥수수, 감자 등 여러 새로운 과일, 채소를 들여왔을 뿐만아니라 금과 은 등 대량의 귀금속을 유럽으로 가져오게 되었고, 그중 특히 아메리카의 금, 은은 에스파냐를 통해 유럽으로 대량 유입되면서 물가를 20,30배 폭등시킨 가격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자본주의적 대규모 경영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탐험가들과 새로운 배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엔히크가 처음으로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당대의 유명한 탐험가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바스쿠 다가마,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 바스코 발보아, 존캐벗,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 후안 폰세 데 레온, 페르디난드 마젤란, 빌럼 바런츠, 아벌 타스만, 빌럼 얀스존 등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 역할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많은 무명 탐험가들이 있었고 에르난 코르테스, 프란시스코 피사로 등 탐험가를 표방한 잔인한 정복자들도 있었다.
대항해 시대는 르네상스의 신기술과 사상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았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부분은 지도학, 항해, 화력, 조선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 서쪽으로 항해해서 아시아로 가고 싶어했다. 가장 중요한 발전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락과 캐러벨이 발명된 것이다. 이 배들은 중세 유럽의 범선을 기초로 하여 지중해, 북유럽 선박의 혁신적인 점과 아랍적인 부분을 추가했다. 그리고지중해를 떠나 대서양으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최초의 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