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 많은 영화가 있지만 장르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는 많지 않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단순한 크리쳐로 존재해왔던 좀비를 소재로 불신과 차별의 드라마를 만드는데 성공해 장르의 탄생을 알렸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보처럼 걷던 좀비는 달리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개인으로 부터 공동체로 발전해 좀비 장르가 다루는 대상은 점점 넓어지게 되었다.
좀비 장르는 자본주의 문명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담긴 장르이고, '전염'이라는 공포를 이용해 인간애의 단절을 그리는 장르이다. 따라서 휴먼 드라마를 연출하고자 한다면 좀비 장르는 적합하지 않다.
한국에 좀비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영화가 나왔다. 그전에 연가시나 감기 처럼 이런 좀비 영화에 대한 시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익히 좀비 장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영화가 거대 배급사를 통해 개봉한다고 하니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영화적인 완성도는 나쁘지 않았다. 전염의 공포, 고립, 차별, 불신, 시스템의 부제, 가치관의 대립 등 좀비 장르의 효과적인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하였고, 한국의 정서에 맞게 녹여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컴퓨터 그래픽이 보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나는 이 영화를 '좀비 영화'로 보길 포기했기 때문에 감동할 수 있었다. 슬픈 음악이 울리고, 배우가 우는데로 함께 울었다. 이 얼마나 성실한 관객인가! 이런 내가 바로 좀비 아닌가!
좀비 영화는 슬픔을 재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감상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주처야 할 이 세계의 부조리는 감성으로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좀비 영화의 슬픈 장면은 기괴함과 서늘함으로 묻어버린다.
제임스 본드가 악당3에게 총을 쏘면서 지나가도 우리는 제임스 본드에게 도덕성을 묻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쓰러진 악당3이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을 비추면 관객은 서늘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는 살인을 한것이다! 좀비 영화는 다큐멘터리적이다.
따라서 지나친 감상주의를 가진 이 영화는 좀비 장르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나는 하이틴 좀비물인 <웜 바디스>도 재미있게 봤다. 도대체 뭘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긴 하지만. 잊혀질 영화를 왜 만드는 지는 자본가에게 물으면 될 것이다. 좀비 영화는 미국의 자본주의적 가치를 비판하는 곳 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좀비 영화의 가장 큰 위협은 좀비가 아니다.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는 백인들이다. 그들은 인간성을 잃은 미국의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 발전해 온 장르가 대한민국에서 거대 극장 배급사와 손을 잡았으니 이것이야 말로 아이너리이다.
이 영화는 궂이 좀비 장르를 쓰지 않아도 -거대 메뚜기 떼가 나와도- 괜찮을 영화다. 궂이 좀비 영화로 만들어도 되지 않을 주제를, 궂이 좀비 영화로 만든데서 일단 박수를 보낸다. 주제와 형식의 일치라는 쾌쾌 묵은 법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좀비 장르를 모독한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해본다.
별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