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2017.6.28(33,771걸음)
오늘은 산티아고에 와서 가장 적게 걸은 날이다.
아침에 출발할 때부터 조금만 걷기로 했다. 왜냐하면 아침에 비도 왔지만 다른 날처럼 많이 걸으면 도착하는 곳은 1500미터 산 정상이다.
지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걷은 것인데, 오른쪽 두번째 마을이 우리가 출발한 마을이다.
이 지도의 오른쪽에서 두번째 마을까지 걸을 생각이다.
원래 이날의 목적지인 만자린(manjarin?) 정상에는 산장이 하나 있는데,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는 작은 산장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산 정상에 있는 대피소 정도 규모의 시설이라서 잠을 자기에는 조건이 너무 열악하다고도 알려져 있다
하루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다고 하니, 우리처럼 걸음이 느린 사람은 아마도 도착하면 숙소가 다 찼을 수도 있다.
꽤 높은 산을 올라가서 힘든 상황에 늦은 시간에 다음 마을까지 추가로 걸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그 바로 전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에서 폰세바돈까지 걸었다.
날씨 때문에 몇번을 알베르게 앞에 나가 봤는지...

어제부터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이 많이 불더니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자고 나니 컨디션은 좋아졌는데, 비가 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대부분 비를 맞고 그냥 걷는다고는 들었는데, 왠지 무리해 걷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출발 준비를 다 하고도 쉽게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 숙소에 있는 사람들은 늦게까지 자느라 일어나지도 않고 있다.
아마도 이들은 오늘 비가 오니 걷지 않을 생각인가?
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 마을을 더 걸어왔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우리보다 전 마을에서 묵었다.
그들이 출발을 했는지 출발했다면 어떻게 하고 걷고 있는지 보고 우리도 길을 나설지 말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짐은 다 싸 놓은 상태에서 밖에 나가보니 처음에는 사람이 거의 없더니 전 마을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하나둘 오고 있었다.
모두 엄청 큰 우비를 배낭까지 뒤집어 씌우고 빗속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행렬을 보면 등 뒤에 커다란 집을 짊어지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보인다.
만약에 비가 이대로 억수같이 오면 신발도 다 젖어서 다음날 걸을 때까지 지장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 우리 숙소에 묵은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나 우비를 입고 출발한다.
비가 온다고 안 걷게 되면 어찌해야 하는지도 대책이 없다.
보통 알베르게에서는 아침 8시가 되면 체크아웃을 해야한다.
여기는 작은 마을이라서 알베르게도 우리가 묵은 곳밖에 없는 듯하니 어찌됐든 다음 알베르게까지는 비를 맞으며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산티아고 순례 때 지켜지는 규칙 중 알베르게에 관한 것은 이렇다.
순례자인 경우 알베르게에서 할인을 받기 때문에 아주 저렴하게 묵을 수 있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한 알베르게에서 이틀을 묵을 수는 없다.
혹시 한 마을에 머물며 하루 정도 쉬어 가고 싶으면 이쪽 알베르게에서 묵고 아침 8시에 체크 아웃을 하고, 자기 짐을 가지고 저쪽 알베르게에 가서 낮 12시가 넘어야 체크 인을 할 수 있다.
이건 산티아고 순례길의 모든 알베르게에 적용되는 규칙이다.
그래서 우리도 계획에 없는 우중 순례를 하기로 했다.
며칠 전에 우비를 사두길 정말 잘했다.
하지만 우비도 딱 잘 산 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넓고 긴 우비가 아니라, 길이가 짧은 바람막이 잠바같이 생긴 우비를 샀다.
그랬더니 걷기 시작한지 몇분 안되어 바지는 다 젖었다.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워서 가방은 젖지 않았지만 우비가 너무 짧아서 바지는 다 젖은 것이다.
신발도 점점 젖고 있었고, 우비를 입고 걸으니까 우비 안에는 땀이 차서 웃옷도 점점 속에서 젖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올때 산티아고를 걷는 건 아주 힘든 일이지만, 그닥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배낭에 씌운 커버 때문에 짐은 더 무거워 보인다.
다행히 출발하고 얼마 안 되어 비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괜히 비온다고 늑장 부린 듯하다.
우리가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비는 이번이 처음 맞는 것이었다.
우리보다 며칠 일찍 산티아고를 걷기 시작한 사람들은 생장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비가 엄청 왔다고 한다.
앞도 안 보이고, 너무 추워서 손이 펴지지도 않아 출발하자마자 큰 난관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때 ‘내가 왜 여길 와서 이 고생을 하지?’하는 의심을 가졌다고 하니 정말로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에 큰 비와 추위를 겪은 사람들은 짐이 무거워도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다.
또다시 억수같은 비와 살떨리는 추위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발도 두개씩 가지고 있고, 우비도 크고 무거운 것으로 가지고 있고, 긴 옷도 위아래로 가지고 있고, 따뜻한 잠바 정도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그 경험이 없어서 남들보다 더 짐이 가벼운 것이다.
처음에 우리 짐에 있었던 긴 우비와 긴 옷 등은 이미 초반에 하나둘 다 버려 우리 가방은 매우 가벼운 상태였다.
누가 더 좋은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우리는 2주 동안 아주 가벼운 짐을 지고 순례를 했다.
가볍게는 걸어왔지만, 내일 가게 되는 1500미터 산 정상은 매우 춥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비는 그치고 바람은 여전히 시원하게 불고 있어서 오전에 걷는 내내 내 기분은 아주 많이 좋아졌다.
어제까지 무겁게 나를 누르던 베드버그 공포도 시원한 바람에 날라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우선은 신나게 걷자.
아무리 걱정해도 베드버그의 공포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만약에 또 물리면 그때는 약국에라도 가서 약도 사먹고 바르는 약도 사고 해서 대책을 세워보자고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이 글은 2017년 6월 10일부터 7월 8일까지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우리 부부의 찬란한 추억이 담긴 글입니다. 사진은 대부분 남편(
)이 찍었습니다. 글은 제가 썼는데 많이 미숙한 글입니다. 그럼에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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