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낙엽이 길 바닥에 흐트러져있다. 나뭇가지에 붙은 노랗거나 빨간 나무이파리는 곧 떨어질 운명임에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아름답거나 즐거운 기억을 준다. 나무이파리의 의지가 아닌 바라보는 자의 감정으로 단풍은 사진에 담긴다.
오늘도 나는 학생들과 만나, 교육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여러 경험과 지식을 떠들었다. 최대한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나의 말을 어떤 때는 알아듣고 어떤 때는 갸우뚱한다. 나의 말을 가려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많다. 표정으로 알 수 있다. 오늘 문득 학생들의 자세와 태도를 논하기 보다 나의 문제점은 없나하고 눈썹 미간을 모아보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학생들이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상황들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은 나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귀결되어서이다. 굳이 꼬리를 물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 나의 문제는, '최대한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범위가 무엇인데? 확인해봤나? 내가 나에게 질문하였을 때 나 스스로 정한 범위였다. 다시 생각을 뒤로 보내보니,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대상은 학생이 아니었다. 학생 중심의 생각과 행동이 아닌 다른 교수를 의식한 나의 행동이었다. 비겁한 행동이다. 현재까지 이점이 문제로 보인다.
나는 학생들을 만날 때, 마지막 만남이라는 자세로 임하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만 달리 보면 마지막이라 마구 주고싶은 것을 마구 쏟아붓고 있다. 천천히 오래 오래 가르쳐줄 생각을 하는 건 어떠냐고 누군가는 이야기하겠지. 깊어가는 가을 나무 이파리가 곧 땅 바닥으로 떨어질 것을 안다. 마지막 발악이라 짙은 색으로 자신을 기억하라고 외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