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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처음 일기를 쓰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와 같다. 내 속을 꺼내놓기 위해 원래 내가 끄적이던 곳으로 돌아가자니 영영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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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나름 단단한 마음을 먹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결국 간과할 수 없었다. 내 속을 쏟아내면 그만이던 혼잣말은 점점 부연설명이 생기는 일(러바치)기가 되어갔고, 꾸미는 것이라곤 외모든 방구석이든 영 소질이 없는 내가 숨구멍인 일기를 다듬고 있자니 제풀에 지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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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글쓰기 기능을 염원하던 입장에서, 사실 글을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 싫지만은 않다. 볼 때마다 떨어져있는 보상액에 도대체 누가 보팅을 취소한건지 신경 썼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쓰다보니 3번은 읽는 사람을 염두한 글이 되었다. 이왕 그렇게 된 것, 이 일기는 ‘비밀일기’ 라서 나만 아는 내용을 두서없이 늘어놓게 될 것이다. 수수께끼냐, 스무고개냐 어려워하지 마시고 몰래 읽고 가셔도 된다. 나 역시 누군가 읽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댓글을 못본 척하게될 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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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알 남지 않은 렌즈를 끼고 총총 걸어 스벅까지 왔다. 요즘 날씨가 어떤지 통 몰랐는데, 습하긴 해도 아직은 선선하구나. 어디든 나가야해서 집 밖으로 나왔던 적이, 전에도 있었지. 나만 뺀 모두가 나를 걱정하던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빈둥대는 것에 아무런 불안함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유로를 마저 쓰고, 다음달 방세를 친구에게 빌리고 나서야 나의 위태로운 아늑함을 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던 차림 그대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집 밖을 나와 쏟아지는 햇살에 주눅들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꼿꼿이 들고선 cadet 역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이 더 많고 더 분주한 쪽으로. 목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쉼없는 발걸음 속에서 나 혼자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집이 어딘지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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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웃는 사람들도 다 뻥같아. 다들 사는 게 얼마나 지겹고 힘이 들까.
그 말에 나는 얼마나 행복을 전파했던가. 세상이 얼마나 살만한지,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고 설득하고 싶었다. 그때의 내가 지금 내 앞에서 그러고 있다면 그래, 너 밝고 긍정적이야. 평생 온실 속에서 행복한 채 살아라. 하고 쏘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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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어떻게든 살고 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집 앞의 작고 조용한 카페를 지나 굳이 여기까지 온 것은. 앉은뱅이처럼 주저 앉아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걷다 지치면 앉아서 쉬기도 하는 거라고. 모래 늪에 서서히 빠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눈치챌 줄 알았더니, 발이 불에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며 이 불길이 얼마나 진실되며 아름다운지를 찬미하고 있다니. 내 발이 타들어가는 아픔같은 건 외면한 채.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겁이 나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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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고 싶은데, 이렇게 떠날 수는 없다. 하나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 한 방울이 이미 마음 속에 번지고 있고, 살면서 지금처럼 여행이 필요했던 순간이 있었나도 싶다. 어, 있었을 거야. 잊었다고 해서 그렇지 않았던 게 아니니까. 삶에 지칠만큼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 지치고 말고 할 일상조차 없는데. 여행에 정당한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왜 이토록 떠나고 싶은가. 모든 것이 허락되고 용서되는 특별한 시공간에 피해있고 싶은 거겠지. 됐고,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제주도에 왜 혼자 가려느냐는 엄마에게, 혼자가고 싶으니까! 마음이 급해 소리치고 말았다. 같이 가자고 하실까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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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만 해도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나의 시간을 가족을 위해 썼다. 그러려고 한국에 돌아왔던 거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떠날 거니까. 다시 나의 삶을 살거니까. 그런데 지금은 타의 반, 자의 반으로 투명인간이 되어 쓸모있는 흉내만 낼 뿐이다. 진저리 나는 죄책감이나 덜어 내려고. ‘할 것이다’ 의 뽀송뽀송한 솜털같은 마음은 ‘해야 한다’ 의 무겁고 축축한 이불 빨랫감이 되었다. 방향을 잃고 말았구나. 다음 여정을 알지 못한다는 게 마냥 낭만적일 때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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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에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 한국에 오기 싫었다. 그래서 그때 올린 글도 다 그 모양이다. 그런데 왜 돌아 왔을까. 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까. 돌아가기도 싫었다. 아무래도 8,9 번은 페이아웃 전 삭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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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누가 가장 부러운가, 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자 했던 때가 있다. 아무도 부럽지 않은 지금은 전혀 소용이 없다 (생각해보니, 꿈이 있는 사람이 부러운데 이것도 소용없지 않은가). 이제는 나의 결핍을 찾는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결핍을 채우려고 살아가는 것 같아서. 외로웠던 사람은 사랑을 찾고, 가난했던 사람은 돈을 찾고, 속박당했던 사람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게 아닐까. 아.... 속박을 당한 적은 없는데.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속박인지도 모르겠다. 죽을 때까진 살아야한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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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쓰고 나니 또 염려가 든다. 축 늘어진 마음 뚝뚝 흘리고 있는 것 같아도 실은 별 일 없다. 별 일이 없으니 이러는 거다. 힘내라는 댓글이 달릴까봐 덧붙이는 말이다. 결국 그저 힘없는 사람으로만 보이기는 싫지 않은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를 직접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도 의문이다. 원래의 나는 어떻더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면 갈수록 모르겠다. 스팀잇을 하고, 여기서 알게 된 사람들을 직접 대면한 이후 더 그렇다. 글과 말에서 드러내는 나의 성격이 이렇게 달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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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것도 좀 보고, 별 일도 좀 만들어 볼까 했지만, 선물받은 음료수를 마시고도 싶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 그런데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이수점인가 사당점에서 이미 누가 썼다고. 그래도 그 당시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마음만으로도 배불리 잘 먹었소. 그리고 카라멜 마끼아또. 평소에 마시던 건 아니지만 다른 음료로 바꾸시겠냐는 말에 아니라고 했다. 달달한 거 먹고 기운내라고 했으니까. 기타소리도 나는 너무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