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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댐은
북한이 금강산에 있는 댐을 무너뜨리면 서울이 모두 침수되니 이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1987년 착공돼 18년 뒤인 2005년 완공 되었다.
그 당시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듣고 공포심에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성금을 내기도 했다.
평화의댐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물도 채우지
않은 채 전 세계 유일한 군사용 댐으로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더욱 개선되면 더욱더 쓸모가 없어질 처지다.
댐을 만든다는 명분하에 학생들에게도 성금을 걷었고,그 후에 땜이 완공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댐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작년 여름 갑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댐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의 시간을 내어서 큰아들과 작은 아들을 데리고 평화의댐으로 향했다.
초행이라 길을 잘못 들어
헤매면서 갔는데,길이 무척이나 구불구불한 탓에 멀미를 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걸려서 도착한
화천 비목공원과 평화의댐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이번 여행은 시작>이 되었다.
비목공원은 한국전쟁의 상흔을 되새기는 작은 공원으로 평화의댐 동쪽 강변에 조성되어 여행자들의 나들이를 돕고 있다.
화천은 6.25 당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화천 국민들의 정성을 모아 탑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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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비목 공원이
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깊은계곡 양지녁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이름 모를 비목이여"
국민적인 가곡 "비목"의 탄생지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사연은 1960년대 평화의댐 북방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한 청년장교가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이끼 낀 무명용사의 돌무덤 하나를 만난다.
녹슨 철모, 이끼 덮인 돌무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새, 하얀 산목련,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깊은 계곡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그는 돌무덤의 주인이 자신과 같은 젊은이였을 거라는 깊은 애상에 잠겼을 것이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을 젊은 넋을 기리는 "비목"의 가사는 이렇게 탄생되었고 이 노래는 70년대 중반부터 가곡으로 널리 애창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가곡, ‘비목’
나도 학창시절에 많이도 불러보았던 가곡이다.
가사를 쓴 장교가 바로 한명희씨이다. 주차장 입구에 "비목" 노래비가 서 있어 방문자들은 누구나 한 번씩 그 앞에 서서 가사를 되새겨 볼수있다.
가곡 ‘비목’의 가사에 담긴 뜻을 깊이 들여다 보면 애절하면서도 묵직한 정서를 느끼게 된다.
현재 비목공원에는 기념탑 외에 철조망을 두른 언덕 안에 녹슨 철모를 얹은 나무 십자가들이 십여개 서있어 한국전쟁이라는 민족 비극의 아픔을 되새기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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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군에서는 매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이곳 비목공원과 화천읍내 강변에 들어서있는 붕어섬 등에서 "비목문화제"를 개최한다.
진중가요, 시낭송 등으로 짜여진 추모제, 비목깎기 대회, 주먹밥 먹기 대회, 병영체험, 군악퍼레이드 등이 나흘간 펼쳐진다
비목공원를 둘러보고 공원에서
내려다보면 평화의땜이 보인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따라 북한의 수공에 대비하기 위해 국민들을 성금으로 쌓은 땜이다.
"일명 서울 물바다 론"
당시 전두환 정부가 불안한 정국을 전환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용 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랬던 평화의 댐이 홍수조절 기능이 입증되면서 현재 비목공원과 더불어 관광 명소로 자리를 잡고 있다.
나의 학창 시절에 건설되던 댐을 이제는 그때 내 나이와 비슷한,나의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우리 민족의 아픔과 분단,그리고 평화를 향한 우리 모두의 염원을 이야기하며 다녀온 뜻깊은 여행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세월의 힘은 실로 많은것을 바꾼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출생의 비극을 품고 있는
비목과 평화의댐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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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진은 이해를 돕기위해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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