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돌고 돌지만, 여름을 딱히 좋은 계절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여름하고 떠오르는 것이라면 그저 장마철, 태풍 뿐이었으니까.
여름밤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 것은, 솔직해질 수 있는 계절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살갗을 더 드러낼 수 있으니까 더 솔직해질 수 있겠지라며 나는 낮보다 밤이 좋으니까, 여름밤을 좋아하게 되었다.
여름밤을 좋아하면서 자주 걷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더워서 땀을 최대한 덜 내려고 했겠지만, 요즘에는 천천히 거닐면서 흐르는 땀을 그대로 느끼는 기분이 좋다. 이런게 즐기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땀을 내면서 걸으면 사소하게 부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여튼 여름밤이 너무 좋다.
그래서 어쩌면 그녀를 여름밤에 만나자고 했는지도 모른다. 여름은 솔직해질 수 있으니 좋고, 그래서 여름밤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니깐.
그녀는 내 이상형에 가까웠다. 아니 이상적인 삶에 근접했다고 할까. 나는 굉장히 영화를 좋아했는데, 우연히 연락이 와서 오랜만에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그녀는 은연 중 나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고도 했었었다. 속으로 내심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꿈에 그녀를 등장시켜 보았다. 하루 종일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나날, 그러한 꿈 속에 점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잘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녀를 이태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가볍게 차림을 하고 나갔다. 그녀는 유럽에 갔다온지 3주가 되었고, 우리는 오랜만에 보기로 했다.나는 그간에 연락을 먼저 하기도 하고 그녀도 연락이 오곤 했었다. 그녀의 연락은 내가 궁금해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지만, '아무렴 어때'하며 근근히 이어갈 적도 있었다. 그녀는 유럽에 오고 나서 나에게 도착했다고도 알렸었는데, 그래서 이제 본격적인 시작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태원에서 태국 음식을 먹으면서 여행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런던에서 베를린, 아이스크림에서 커피까지 넘나들며 다양한 주제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음식을 먹으면서도 드는 생각은 쥐뿔만큼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은연 중에 깨달았다.
단 한 번도 질문이 없다는 것. 이것이 내 마음이 안타까움을 불러왔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만남 그 자체가 좋았다.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에 맞춰봤던 사람이 아주 가까이 있었으니 그랬다.
여름에는 해가 늦게 지기에, 저녁을 먹고 자리에 일어서도 밖은 밝았다. 하지만 해는 이미 저물고 있었고, 경리단길까지 걷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집을 찾으러 떠났던 걸음이 조용한 바로 이끌었다. 나는 전혀 스스로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연히 그녀에게 요즘 여름에 걷는게 참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며 자기는 너무 덥다는 것이다. 예상과는 다른 말이 되돌아왔지만, 그래도 꿈꿀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니까 하며 같이 있음에 작은 기쁨을 느꼈다. 경리단길에 들어서면 '무명여배우'라는 곳이었는데, 더할나위 없이 조용했고 우연히 들어간 곳 치고는 분위기도 좋았다. 또 우리는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은 참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리고 그런 대화의 순간에도 기분이 쉽게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다시 알게 되었다.
대화 도중 우연히 나온 일본, 아니 시부야가 발단이 되어 아주 아무런 마음도 없이 던진, 누구랑 가냐는 말에 그녀는 남자친구와 간다고 말을 했다. 순간 모든게 깨지는 순간이었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 어쩌면 진실을 마주하게된 순간이었다. 나는 시부야에서 대만으로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넘겼지만, 내 안의 비참함과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왜 그녀는 나를 만났을까. 더군다나 유럽을 가기 2주전에 만났다니 아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리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커져만 갔다.
혼자만의 심한 착각을 했었다는 후회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있고 싶지 않았지만, 그 때 하루종일 내릴 듯 말듯 했던 날씨는 결국엔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속으로 비가 그치면 가야지, 가야지 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낸 뒤 드디어 비가 그치게 되었고, 다시 이태원역을 향해 갔다. 그녀는 한강진역까지 걷자고해서 그러기로 했다. 걸으면서 우리는 때로는 말이 없어졌고, 그럴 때마다 서로가 마치 의식한 것 같아서 나는 물어보고 싶지도 않은 것들을 물어봤다.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더 비참했던 것은 불과 몇시간 전만하더라도 그녀에 대해서 알고 싶어 질문을 했던 것이 변질되었다는게 싫었고, 그 것을 행하는 주체가 나라는 것은 더욱 싫었다.
겨우겨우 어색한 대화, 어쩌면 나에게만 어색한 대화를 마치고 한강진역에 도착했고, 그녀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그리고 말 없이 내려가기에 조금 길었던 에스컬레이터를 말 없이 걸어가고 사소한 농담을 던지며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랬다.
나도 그녀에 대해서 몰랐던 것이 많았지만 그녀도 마찬가지로 몰랐던 것이 많았다. 사소하게는 그녀는 내가 어디사는지 조차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으며, 나는 그녀가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근처를 거닐면서 시부야, 영화, 무명여배우 공간에서의 어색한 공기들이 머릿 속을 어지럽혔지만, 해프닝이라고 치자라고 생각했다. 그저 해프닝일 뿐이다, 365일 중에 단 하루는이럴 수 있는 것이다,하며 조금 비참해진 감정을 이겨보고자 했다.
남녀 관계에서 어디까지가 솔직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솔직하지 않은 것일까. 살갗을 맞대는 것처럼 솔직한 감정도 맞댈 수 있을까. 왜 진실은 불편한 것일까.
그래도 여름밤은 솔직해질 수 있어서 좋다. 그렇기에 열대야는 더 솔직해지라는 여름의 시샘이다. 나는 조금 더 여름밤을 즐기고, 느끼기로 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여름밤을 예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