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나 지금 출발. 30분 있다 도착.]
핸들을 꺾었다. 30분, 차를 세워두고 가기 적당한 시간이다. 여유가 있으니 사진집 원고도 작업실에 두고 가야지. 신호에 걸린 동안, 곁눈질로 서류 가방을 더듬어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쓰익 하고 와이퍼가 지나간 차창 위로, 빗방울이 다시 떨어진다. 문득 궁금하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뭐라고 쓰면 좋을까.
나에게는, 비가 주룩주룩 내린 적이 없다. 후드득후드득 내린 적도 없다. 그것들의 소리는... 글자로 옮겨지지 않았다. 어떻게 옮겨도 내가 들은 소리와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오히려 상대음감이 있는 내게 악기 소리는 그 음이름으로 말을 걸어오곤 했지만, 저런 일상의 소리들은 말을 걸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내가 이 사회 깊숙이 받아들여질 수 없으리란 걸 직감했던 이유다. 현실은 마치, 너는 알 필요 없으니 나가 놀기나 하라는 듯이, 나를 외면했다.
뭐 어쨌거나 상관없다. 수습기자 생활을 하다 쫓겨나고 사진작가 일을 시작한 나에게 첫술이란 꽤 배부른 것이었고, 아는 시인과 함께 펴낸 첫 포토에세이집은 사진집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 종합 50위권 내에 드는 기록을 냈다. 불안하지만, 그래도 나름 밝게 빛나는 지금이다.
작업실은 도시 외곽의 작은 상가 4층에 있었다. 카드키를 대고 열쇠를 돌리자, 깜깜한 방에 복도의 불빛이 드리웠다. 더듬더듬 스위치를 켜고, 널브러진 테스트 필름들을 한쪽으로 치운 후 그 자리에 원고가 든 누런 봉투를 살포시 얹었다. 봉투 한쪽 모서리에 치여 액자가 살짝 돌아갔다. 중학교 친구들. 서진이도 그중에 있었다. 같은 동네라 종종 등굣길을 같이하곤 했던 그 친구의 말을 라디오에서 듣게 될 줄이야...
이자카야.
“이번엔 또 무슨 사진집이야?”
“자전거.”
“자전거는 무슨, 탈 줄도 모르면서.”
아무래도 내 앞에 지금 앉은 친구는 서진이다. 여전히 툴툴. 이것도 팩폭이라고 해야 하나... 잔을 들이켜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모르니까, 어쨌든 나한텐 특별한 거잖아.”
“그럼 그러든가. 내가 뭘 알겠니.”
슬쩍 쳐다봤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회를 초장에 찍는 서진. 잔을 내리고 살짝 눈치를 보았다.
“오늘 방송 들었어. 잘하더라.”
“방송? 뭐, 내가 하는 은별? 뭐하러 들어 그걸, 재미도 없는 거. 요새 들어오는 사연들 보면, 에휴... 재밌는 사람들은 죄다 사연 보낼 시간도 없나봐. 정치인이라도 데려다 써야 하나.”
얘 또 이러네, 쓴웃음을 지었다.
“재밌었어. 근데 너 가을 좋아했어?”
“그야 작가가 쓴 거지. 가을엔 가을이 최애인 거고, 여름엔 여름이 최애라 말하는 거 아니겠니. 참, 오늘 고딩 하나는, 편지 보내서 뭐라더라. 뭐, 청자들 공감해주는 멘트가 너무 좋아서 자기도 배우고 싶다고? 걔도 참,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너도 고딩 때 저랬냐? TV에서 다들 자기 생각 자기가 말하는 줄 알고?”
다시 한 모금 목을 축였다. 어쩌면 그땐, 그래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가끔, DJ 목소리에 꽂혀 가만 듣다 보면, 글을 쓰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잊을 때가 있다.
“팬레터 받은 거야? 어디 한번 줘봐. 얼마나 순수한지 나도 한번 보게.”
“지금은 없어. 차에 있지.”
“다음에 보여줄게. 기억나면.”
어린 시절처럼,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다, 서진이네 매니저가 숨이 차 들어왔다. 밤이 늦었는데 하도 연락을 안 받아서 뛰어왔단다. 하긴, 내일 스케줄도 있을 테니...
자리를 정리하고 돌아오는데 마음이 은근히 무거웠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한 걸까...
written by witz-bald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