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
음.. 뭔가 어려울 것 같다.
이 책 제목만 보면
그다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려 한 이유는
‘미움받을 용기’를 쓴 작가
기시미 이치로 때문이다.
그의 책을 몇 권 읽어보니
생각보다 이해하기 쉽고
이기주 작가의 책처럼 빠르게 읽혔다.
완독이 가능한 책 중 하나다.
이 책의 서평을 찾아봤는데
평도 나름 좋았다.

그런데 아들러가 누구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에게 프로이트와 융이라는 이름은
익숙한 편이다. 반면 동시대를 살았던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알프레드 아들러라는
이름은 비교적 생소하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아들러는 프로이트, 융과 더불어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
프로이트와 융도 잘 모르는데...
그렇다면 세 명은
심리학의 3대 거장이구나..라는
사실만 알고 가도 될 듯하다.
이 책에는 3가지 용기(미움받을 용기,
평범해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가 나온다.
이를 2회로 나눠서
1부 미움받을 용기와 평범해질 용기 편
2부 행복해질 용기 편으로
포스팅 하고자 한다.
<미움받을 용기 -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가>
#1 (p.23-26)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
강의를 하며 만난 사람들 중 상당수가
너무도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살아가고 있었다.
‘혹시 저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게 되지는 않을까?’
늘 그런 걱정을 달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래 열 명이 있다면
그 중에는 내가 무엇을 해도
나를 싫어할 사람이 한 명은 끼어 있다.
반면 열 명 중에서 최소한 두 명은
내가 무엇을 하든 나를 이해하고 좋아해준다.
우리가 좋은 관계를 가져가고 싶은 사람은
이 두 사람이다.
나머지 일곱명은 그때그때 태도가 달라진다.
(중략) 나를 싫어하는 한 명은
내가 뭘 해도 나를 싫어한다.
그러니 그가 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끙끙거리며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살면서 남의 시선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애쓸 필요도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항상 ‘그래, 그렇지! 그럴 필요가 없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집중하자!’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며칠 후면 또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음을 느낀다.
이 글귀를 읽는다 해도
내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단시간 내에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읽고
또 읽게 되는 이유는
글귀를 읽고 있는 순간만이라도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내 마음을 토닥여주고 싶어서
그런게 아닐까.
그래도 그래도
남의 눈치만 보며 남에게 맞추는 내가
계속 밉게만 느껴진다면
법륜스님의 말씀처럼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남한테는 잘하고
나한테는 못한다고 화를 내지 말고,
나한테는 못하지만
남한테라도 잘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 법륜스님의 ‘야단법석’ 중에서 -
업무상의 대인관계를
교우관계로 보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 업무상의 관계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다친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중략) 교우관계처럼 여기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은 친구로서
관계할 필요가 없다고 까지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업무상의 인간관계와
교우관계를 구별하는 것은 유용하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공감했던 부분이다.
“교우관계처럼 여기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업무상의 인간관계와
교우관계를 구별하는 것은 유용하다.”
사무실에서 친해진 사람에게도
어렸을 때 사귀었던 옛 친구 정도의
기대를 품어서 그런지 본의아니게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지금 당장은 친하게 잘 지내니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것 같지만,
그것은 내 생각일 뿐.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관계가
업무상의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다.
#2 (p.38) <인생의 거짓말>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거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것에 동반한 책임을 받아들일 각오가 필요하다.
자신의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고
그 결과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행위가
낳은 결과로서 인정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의 등장도
받아들여야만 하고,
위험을 끌어안을 용기도 필요하다.
내가 무언가를 주장함으로 인해
동반되는 책임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등장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좀 ‘헉’ 했다.
전혀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하긴 내가 무언가를 얻음으로 인해
반대로 잃게 되는 사람도 있을테니..
그럴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3 (p.48) <알아차림과 배려의 세계에서 벗어나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면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선의에
달린 것이지 의무는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의 마음을 미리 알아주고
배려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한
자신의 생각은 타인에게 전해질 수 없다.
<평범해질 용기 - 반드시 특별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1 (p.111) <평범해질 용기>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밑바탕에는 스스로가 못났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정도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보통으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2 (p.117-120) <그저 ‘있다’ 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라>
아이의 ‘존재’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가 무엇인가를 했기에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그저 ‘존재’ 하는 것 자체로
이미 기쁘다고 전해야 한다.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기준으로
현실 속의 아이를 보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기준으로 삼고
현실 속의 아이를 보면 그 아이가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쁨이다.
그 아이의 어떤 모습이라도 좋게 보인다.
나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병으로 쓰러져 입원했을 때
나는 밤낮으로 간병에 매달렸다.
당시에 나는 젊었기에 조금 무리해도
힘든 줄 몰랐지만 그래도 주말만큼은
다른 가족에게 간병을 맡기고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월요일 이른 아침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월요일 이른 아침에
어머니가 계시는 병실로 들어서려고
할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중략) 평소처럼 어머니가 숨을
새근새근 내쉬며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곤 했다.
이른 아침의 병실은 언제나 고요하다.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는 숨소리도
크게 들리기 마련이다.
그 숨소리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아아, 정말 다행이다.
어머니께서 편안하게 숨쉬고 계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
그 존재 자체가 고마움이었다.
아이를 대할 때도 그런 마음이어야 한다.
문득 ‘나는 내 부모에게 어떤 자식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어른이고, 독립된 존재이기에
부모 말을 안 듣는 건 물론이고,
부모에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잘 못하고 있음에도
내 아이는 끝까지 내 말을 잘 듣고,
나에게 잘하는 아이가 되길 바라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 봤다.
임경선의 <자유로울 것> 책에서는
“아이는 어쩌면 라고 말하고 있다.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나 준 것만으로도
부모에게 할 도리는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첫 삼년 아가시절의 사랑스러움으로
이미 평생할 효도는 다했다고 한다.
아무튼 존재 자체가 기쁨이고
순수한 행복이라는 감정을
자주 느끼게 해준다.”
부모가 그저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감사하듯
내 아이도 존재 자체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면
임경선 작가의 글귀처럼 순수한 행복이라는
감정을 자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살아 있는 것,
그 존재 자체가 고마움’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참 아릿하게 전해져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