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되면 교과서에 맞춰 공책을 준비하고는 했다. 교과서 하나에 공책하나를 짝지어 주고나면 새 학기가 시작됐다.
나는 무줄 공책을 하나 사서 낙서장을 꼭 만들었다. 줄이 없어 규칙도 없던 이 공책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떠들 수 없는 수업시간에 짝꿍과 낙서장에 글을 써 대화하기도 했고 쉬는 시간 빙고 게임에 쓰기도 한다. 무의미한 것들이지만 낙서장에는 의미 없는 것들로 채워져야 한다. 그게 낙서장의 역할이니까.
낙서장은 자유롭다. 국어공책은 국어 이야기로, 수학공책은 수학 이야기로 쓰인다. 낙서장은 정해진 교과서가 없다. 오롯이 나를 위해 쓰인다. 낙서장을 끝까지 다 써 본적 없다. 낙서장은 다 쓰일 필요가 없다. 낙서장을 검사하는 사람은 없다. 다 안 썼다고 뭐라는 사람도 없다. 빈 채로 끝나는 게 낙서장의 본연이다.
회사를 다니고부터는 낙서장이 없어졌다. 사회생활에 무의미는 없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결과가 생기고 책임이 따른다. 낙서장의 무의미가 무의미해졌다. 무의미가 없다 해서 모든 게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여유만 없어졌다.
이제라도 나를 위해 자유로운 낙서장 하나 만들어 줘야겠다. 무엇이든 끄적일 수 있는 그런 낙서장을. 그럼 잃었던 여유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