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보고 온 게 벌써 두어 달이 되어가는 것 같다. 리뷰를 써야지 생각하고는 찍어둔 사진을 핸드폰에서 노트북으로 옮겨둔 탓에 미루고 미루다 오늘 틈새에 갑자기 생각이 났다.
사실 알렉스 카츠가 가진 회화의 명랑한 색과 포즈를 리뷰하고 싶었으나, 얼마 전 보고 온 덕수궁 미술관의 그림 한 점이 눈길을 잡아 결국 초상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다양한 작품을 접하면서도 항상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초상화였던 것 같다. 그것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이든, 혹은 이상적 모습을 그린 것이든, 그리는 이와 그려진 이의 생각 혹은 마음이 얼굴로 표현된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알렉스 카츠는 그런 면에서 자신만의 화풍을 개성적인 인물화로 잘 그려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그려진 그림은 불필요한 선은 하나도 넣지 않겠다는 결심이 보인다. 그럼에도 그려진 명암 하나하나에 모델이 어떤 움직임으로 표정을 짓는지, 어떤 에너지의 사람인지 느낄 수 있는 생생함이 존재한다.
한가지 놀랐던 것은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실은 객관적 시각에서 오는 것이라는 인터뷰였다. 인물화를 그릴 때 작가는 특별히 그 인물에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대상과 심리적 거리를 두고 객관적 입장으로 작업을 하려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애정으로 읽힌 그림의 정체는 철저한 관찰에서 온 결과물인 것일까?
갑작스럽게 이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덧붙이고 싶은 초상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개관 후 20주년을 맞는 해이자, 일제강점기 이왕가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어 80년이 지난 해이다. (관련한 덕수궁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기회를 만들어보고...) 이를 기념한 전시가 현재 열리고 있다.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전”이다.
전시실 한 편의 “친구의 초상”
그린이는 구본웅, 대상은 이상이다.
소학교 시절 동창으로 만나 평생을 친구로 지낸 둘에게 살아온 세월의 배경적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듯 하다. 무튼 화가 구본웅이 그려낸 작가 이상은 검붉은 색으로 뒤덮인 화면에 매서운 눈매와 붉은 입술,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다. 세밀히 묘사된 그림이 아님에도, 친구가 그려준 이상의 모습에서 예민하고 치열한 지식인의 고민이 자조적인 태도로 보여진다. 곁에서 줄곧 지켜봐 온 이상의 모습은 자신의 투영이기도 할 것이다.
표정이라는 것이 무의식적인 감정과 행동들 속에 나오는 수만가지 언어라고 하는데, 초상화 속 박제된 표정의 누군가는 항상 관람자의 태도에 따라 다른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알렉스 카츠의 객관적 시선으로 완성된 여인들은 역동적이지만 우아하다.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꽉채워 살아가는 삶의 단단함을 읽었던 것 같다.
이후 보았던 초상 속 이상은, 그저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울분과 냉소가 가득한 마음 속의 불안한 내가 한번은 밖으로 나오는 느낌이었다.
한참이나 빠져서 바라보던 그림들의 감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길어지니 얼마 전 마켓 생각이 부쩍 났다.
사실 나는 누군가에게 찍히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스스로도 사진 찍는 것을 극도로 꺼려해서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초상화를 그려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그리는 이가 아닌 그려지는 이의 입장에서...) 누군가 앞에 앉아 내 마음이 읽히는 일인거만 같아서 선뜻 나가 앉지 못하고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그럴 때의 나는 세상에서 제일 소심하고 부끄러운 상태가 된다.
사실 한번은 앉아 보고 싶었는데, 타인이 보는 나를 들여다볼 엄두가 안나 쭈뼛거리다 시간이 지났다. 그저 가볍게 생각했어도 됐을 일이었는데, 나는 왜 그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내 생각을 말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익숙해지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었다. 그래서 남들이 보면 좀 오해가 생기기도 하겠다.
마음을 읽히는 일이 아직도 많이 어려운 내가 그래도 앉아보고 싶었다는 속마음을 뱉었으니 다음은 좀더 나아지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를 해야겠다.
오늘도 시작은 리뷰였지만 자기 반성과 고백으로 끝나는 이상한 리뷰가 되었으나, 두 전시 모두 충분히 볼거리들이 많으니 시간이 되신다면 보시기를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