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친구가 있다. 아! 이 친구랑은 내가 어디에 있던지 관계가 아주 오래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
메리안 내가 그녀를 만난 건 처음 다니던 직장에서였다. 그녀는 회사 입사 전부터 직원들 사이에서 까다로운 QA 엔지니어가 들어온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아마도 입사 전부터 회사 분위기 파악도 해야 한다며 미리 탐사를 올 정도로 이것저것 요구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입사한 그녀는 소문답게 까다로웠다. 이런저런 미사여구 없이, 직책이 어떻든 상관없이, 핵심만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그녀를 엔지니어들은 싫어하기 시작했고, 미국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나는 자연히 그녀가 맘에 들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일을 하던 그녀가 내가 디자인한 인터랙션이 엔지니어들이 만든 것과 다른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이것저것 물으면서 시작이 되었다. ( 아! 그러고 보니 지금 회사에도 QA 엔지니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엔지니어들 쫓아다니면서 설명하고 바꾸어 달라고 하기도 너무 지친다. ㅠㅠ 그들은 모른다. 잘못된 인터랙션 하나가 내 머릿속에서 나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ㅠㅠ)
일을 제외하고 그녀와 친구가 된 것은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겠다. 까다로운 둘이 통했던 것일까? 언제부터 그녀는 나에게 개인사를 이야기했고, 난 언제부터 그녀와 점심을 같이 먹었는지...
아마 내가 그녀의 집에 가기 전까지 우리는 많은 시간과 시련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의 증상에 속상한 마음을 나에게 많이 풀어내기도 했고, 내가 자신의 엄마와 또 자신의 남편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때론 좋아하고 때론 짜증도 냈었던 거 같다. 18살에 19살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사는 그녀가 아이가 있었으면 조금 달랐을까? 그녀에게 아이는 없었고, 아이가 없는 것이 마치 그녀의 잘못인 냥 온갖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약간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런 거 보면 동서양이 너무 비슷한 듯)
그 오래전에는 어떠한 일로 그녀가 삐졌었는지 혼자 삐져서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하다가 어떻게 다시 연락이 닿았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둘은 많은 풍파를 지나 지금까지 진심을 털어놓는 친구다. 아마 학교 다닐 때 만났던 친구들 다음으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 꾸준히 연락하는 친구인 듯 하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우리의 나이 차이로는 친구가 되기 어려웠을 텐데...
그녀의 가족과 언제부터 추수 감사절을 같이 보냈는지 모르겠다. 뭐 추수감사절이라고 해도 내가 칠면조를 사다가 요리를 해서 같이 먹을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면 집에 있을 텐데 그런 나를 챙겨주니 고마울 뿐이다. 올해는 그녀가 추수감사절 연휴에 남편과 둘이 여행을 가야 해서 일주일 일찍 그녀의 집에 방문했다.
그녀의 남편 론은 취미가 활 사냥이다. 그의 작업실에는 그가 만든 활과 화살이 다양하다. 요리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땡스기빙 요리는 항상 론 담당이다. 매년 디저트까지 다 만드는데 올해는 메리안이 뉴욕타임즈에 나온 애플파이를 만들었다.
내가 지금보다 어릴 때 아르바이트했던 회사에는 50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하시던 할아버지가 계셨다.
금혼식이 내일모레라고 말씀하시던 할아버지는 사실 별거 중이셨고 가족들과는 연락도 거의 하지 않고 사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나이에 나는 그 금혼식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50년 결혼 생활이 어려울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나 보다. 막연히 내 인생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반세기 동안 이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분들이 내 부모님이셨으면 좋겠다고 소망했으니까. 그러나 그 소망은 아빠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의 내 나이면 그래도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그 시절에도 내가 결혼을 안 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짐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잘하면 메리안과 론의 금혼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같이 흰머리가 생기며 같이 나이 들어가며 서로서로 챙기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지금처럼 건강히 오래오래 함께하기를...
메리안과 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기차 안. 이제 제법 추운 날씨가 겨울임을 말해주나 보다. 올해가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쓸쓸한 감정 속에서 잡을 수 없는 시간이 점점 더 소중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