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날들임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우리는 내가 퇴원할 때까지 철부지 10대처럼 비밀리에 애정 행각을 벌였다. 나는 마침내 야생의 본능을 되찾아 서커스단에서 탈출한 사자처럼 그동안 억눌려 있던 힘과 에너지를 수지 큐에게 모두 쏟아부었다. 그녀가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며 호르몬의 파도에 몸을 맡길 때 나는 잠재된 에너지를, 되살아나는 생명을, 살아있음을 느꼈다.
“신기해. 이게 내 몸이라는 게.”
어느 날 내가 말했다. 몸과 달리 뇌는 여전히 소년의 몸을 쓰던 기억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 몸을 볼 기회는 많았으나 쓰는 데는 인색했기 때문에 가벼운 인지부조화가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목소리는?”
그녀가 물었다.
“그것 역시 예상 밖이야.”
나는 지미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라고 생각해 왔다. 머릿속으로 중얼거릴 때도, 상념에 잠길 때도, 화를 낼 때도, 웃을 때도 지미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내가 좀 더 높고 거친 소리를 냈다. 부드럽고 따뜻한 아버지의 목소리는 지미가 더 많이 닮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네 목소리가 더 멋있으니까.”
“그래, 나쁜 남자 같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미보다 약간 어리게 생긴 얼굴은 세월의 흔적이 극적이지 않아 멋이 없었다. 게다가 생기는 오히려 떨어져 보였다. 비슷한 것은 키뿐이었다.
“근육은 금방 늘어날 거야. 지금도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잖아.”
그녀가 관능적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너와 함께 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어. 마치 이걸 수없이 반복해온 것처럼. 아니, 이걸 해야만 하게끔 예정된 것처럼 느껴진달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말조차 수없이 발화된 것처럼 아득해지는 느낌에 빠졌다. 그녀의 대답이 거기에 공명을 일으켰다.
“수없이 한 것도 맞고, 해야만 하는 것도 맞고, 계속 예정된 것도 맞고.”
강렬한 데자뷔에 말을 잃은 나를 그녀는 자신의 새까만 머리와 대비되는 새빨간 입술로 훑으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나는 밤마다 소년에서 남자로 다시 태어났다.
한여름 밤의 꿈 같은 나날은 멋대가리 없는 기자 회견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회견은 철저히 내 의사에 반해 이루어졌다. 나는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번에는 주목받는 데 익숙한 지미 또한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그럼에도 기자 회견은 강행되었는데, 센터 관계자들의 위신, 연구비 후원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할 힘이 해든 가家의 쌍둥이 형제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목소리 큰 엄마조차도 센터 결정에 순순히 따르는 바람에 나는 내가 어른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퇴원 후에도 한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시달렸는지 미디어들을 상대로 소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만났던 사람과 받았던 편지의 몇 배를 보름도 안 되는 시간에 갱신했다. 그런 관심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엄마가 충고했지만 내게는 어불성설일 뿐이었다. 대중의 관심으로 먹고사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불편을 감수해야 하나? 그들의 관심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아닌데. 누워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인간들이 유명세를 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친한 척하는 것도 역겨웠다. 누군가 성공하고 유명해진 다음에 그를 잘 대해주는 건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가 동틀 무렵 가장 어둡고 추운 길을 걸을 때 동행했어야 한다. 내게는 그런 인간 따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미디어의 인공 조명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설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20여 년의 격차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언젠가 삶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던 것처럼 내 앞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일종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느낌은 내 심장, 신경, 근육, 세포 하나하나를 약동시켰다. 나는 고작 다시 일어난 일 따위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은 그보다 더 높은 의의를 품어야 했다. 내 존재는 이곳이 아닌 다른 차원, 지금이 아닌 먼 미래에도 의미가 있어야 했다. 중력에 붙박인 미개인으로 살다 죽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다시 일어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우주를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주로 나아간 사람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