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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식사 내내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꽃피웠다. ‘11월은 늦가을인가 초겨울인가’ 같은 남들이 보기에 하찮은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공통의 취향을 일찍이 파악하고 끊이지 않는 대화를 이어갔다.
“사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지금까지 증명된 적도 없구요. 그런데 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본능적으로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 아닐까요?”
“좋은 가설이에요, 잭. 그런데 오류가 하나 있어요.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간이 어떻게 알고 있죠? 어떤 것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되려면 그걸 경험해 봐야 하잖아요.”
“그 공포심은 우리 유전자에 각인돼 있죠. 사람이 죽으면 영영 깨어나지 않는다는 걸 수십만 년 동안 경험해 왔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말한 오류는 해결되지 않아요. 살아있는 사람은 죽음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잖아요. 그 오류에 대한 적절한 답은 이거예요. 생명체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요. 경험하지 않고도요. 말 그대로 유전자에 각인된 거예요. 그래서 우린 높은 곳에 올라가면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게 돼요. 죽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경험하진 않았어도 죽음이 생명 활동의 종료를 뜻한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일차적인 욕구이며 지속적인 목표이기도 하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됐느냐 이거죠. 그건…….”
“잠깐만요, 저는 당신 입장에서 당신이 해야 할 답변을 한 것뿐이에요. 더 적절하게요.”
“오케이. 그 문제는 일단 여기서 접어두죠. 어쨌든 결론은 확률적으로 보면 톰 행크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예요. 백번 양보해서 아버지가 죽어서 천국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쳐요. 천국까지 가서 왜 그러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정말 할 일 없고 심심해서 그러고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와의 대수롭지 않은 약속을 지키려고 터미널에서 그 생고생을 한단 말이에요.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그런 꼴로 있는데 잘했다 칭찬하겠어요? 살아생전 못한 효도를 그런 식으로 한다고 뭐가 기쁘겠냐구요.”
우리는 영화 <터미널>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극 중 톰 행크스가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베니 골슨의 사인을 받으러 기를 쓰고 뉴욕에 가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내가 톰의 행동이 무의미한 시간 낭비라고 단언하자 그녀가 맹렬히 반대하며 영화에 흐르는 감상적인 휴머니즘을 옹호했던 것이다. 그녀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톰을 편들었다.
“잠깐만요. 영화에선 톰이 효자였는지 아니었는지 안 나왔던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그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에요. 물어볼 필요도 없죠. 영화에서 보여진 바로는 그는 둘도 없는 효자였을걸요.”
“그건 인정해요. 그런데 제 얘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걸요? 톰 행크스는 사실 아버지와 직접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마지막 사인을 대신 받아달라고 유언을 남긴 것도 아니구요. 그 양반 혼자 결심한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니 더 바보 같은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뭘요?”
“바보 같다고.”
“사실이 그렇잖아요.”
“실용적이지 못해서?”
“비슷해요.”
나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들으면 실망할 만한 생각도 거침없이 털어놓을 수 있다. 역시나 그녀는 다소 실망한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것으로 점수를 하나 잃었군. 그렇게 마무리 지으려는 찰나 그녀가 다시 논쟁의 불씨를 되살렸다.
“좋아요. 톰의 행위는 당장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어요. 당신 말대로 사후 세계가 없을 수도 있구요. 그래요, 신조차 없다고 가정하자구요. 그래도 톰의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건 아니에요.”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진정하고 들어 봐요. 그건 말이죠.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거라구요.”
“……그게 다예요?”
“그게 가장 중요한 거예요. 누가 지켜보든 안 보든, 보상이 따르든 안 따르든 약속을 지키는 거. 그에 대한 평가 주체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라서 안 지켜도 상관없을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거. 그게 성숙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자세인 거죠. 여태 몰랐어요?”
“이제부터 알면 돼요.”
“수긍이 빠른데요? 좋은 자세예요.”
촛불에 노랗게 물든 하얀 식탁보 위로 산들바람이 불어와 조심스레 마주 보고 있는 두 남녀의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휘감고 지나갔다.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 고운 감촉이 손바닥 안에서 선명하게 살아났다. 수지 큐를 통한 경험이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계속 그러고 있기가 민망해졌다. 때마침 웨이터가 커피를 가져온 덕분에 허전한 손은 다른 할 일을 찾았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저녁 내내 까먹고 있던 걸 물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뭐예요?”
그녀는 얼른 답하지 않고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맞춰 봐요.”
“배우?”
“그렇게 보여요?”
“영화에는 다양한 배역이 필요한 법이죠.”
“인정머리 없다는 말 많이 듣죠?”
“원래 진실을 말하는 자는 핍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죠.”
“잭, 당신은 정말……,”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뒤로 몸을 뺐다.
“재수 없어요.”
활짝 웃으며 그녀는 그렇게 끝맺었다. 욕을 먹고도 기분이 좋은 경우가 있음을 처음 알았다.
“연구원이에요.”
그녀가 담백하게 말했다.
“무슨 연구?”
“신경과학 쪽이에요.”
누군가의 못 미더운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다. 나는 밀려오는 불쾌감을 내뱉듯 혀를 쑥 내밀었다. 거의 조건 반사적이었다.
“범생이 타입은 싫으시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최고로 밥맛 떨어지는 인간이 있는데, 그 녀석도 비슷한 일을 하거든요. 갑자기 떠오르지 뭐예요. 우리 뇌는 대체 왜 이럴까요? 왜 우리가 원치 않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만들까요? 좋은 것만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그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면 결국 좋은 생각이 되겠죠.”
“러브 앤 피스라. 실로 이 도시와 어울리는 말이군요. 요즘은 외지인들이나 하는 말이지만.”
“저 외지인 맞아요.”
그녀는 멋쩍은 듯 촛불에 저녁놀처럼 물든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사거리에서 사고가 있던 그날이 첫 출근이었죠.”
“전에는 어디 살았는데요?”
“헌팅턴 비치요.”
“아하, 그래서 그때…….”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인연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만약 내가 억지로 워크샵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까? 릭이란 놈에게 수지 큐의 과거를 듣고, 그래서 우울하게 걷다가 그녀와 마주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수지 큐와 헤어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때 헌팅턴 비치에 가지 않았다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