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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가 완전히 기울어 마지막 숨을 찬란히 내뱉을 즈음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번에도 역시 저녁은 네모에서였다. 거기서 파커 씨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파커 씨는 그녀를 호감 어린 눈빛과 미소로 대했다. 그녀 역시 파커 씨를 마치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게 느끼는 것 같아 합석은 모닥불처럼 훈훈한 온기를 띨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비난하며 손쉽게 연대감을 형성했다. 전혀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나를 편하게 여기는 게 고맙기까지 했다. 격 없이 함께 웃고 떠들고 열띤 논쟁도 벌일 수 있는 친구가 삶에서 얼마나 있겠는가. 그 소중한 경험과 시간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유쾌한 시간의 말미에 파커 씨가 커피로 축인 입술을 다시며 말했다.
“내가 아가씨라면, 음, 비유가 틀렸구먼. 내게도 딸이 하나 있지. 샐리, 그 애도 의사라오. 여기나 LA에서 일했다면 편하게 많은 돈을 긁어모았을 텐데. 허영 덩어리들의 주름이나 봐 주면서 말이오. 아무튼 그 애는 지금 아프리카에 있다오. 죽을 고생을 실천하고 있지. 남자를 잘못 만난 탓에. 사위 놈이 MSF에서 일했거든. 국경 없는 의사회인지 뭔지 말이오.”
파커 씨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서툴게 조작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굳이 화면을 보지 않아도 파커 씨의 그윽한 눈빛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파커 씨는 딸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사진이 파커 씨의 눈길을 오랫동안 붙잡아두었다. 파커 씨가 그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 우리는 그 이유를 단번에 이해했다. 사파리룩의 여자가 세 살배기 여자아이와 함께 그 지역 아이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으나 건강하고 강인한 매력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유전 형질과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게 분명했다. 그들과 함께하고 싶은 파커 씨의 심정이 나와의 사이에 놓인 세월과 경험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전해졌다.
“귀여워라. 몇 살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이제 네 살 됐지.”
“걱정되지 않으세요?”
“되다 뿐인가. 연을 끊기 직전까지 싸웠다오. 애만이라도 보내라고, 빌다시피 했지. 그래도 소용없었소. 자기가 있는 지역은 안전하다나. 위험하다고 다 떠나면 이 사람들은 죽으란 말이냐며 소리를 지르더이다.”
“신념이 강한 분이군요.”
“그래요, 그런 녀석이지.”
“누구 닮아서 그럴까요?”
내가 끼어들어 깐족거리자 그녀가 눈을 흘겼다. 당사자는 개의치 않는 듯했지만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파커 씨는 여전히 그윽한 눈빛으로 사진 속 딸과 손녀를 어루만졌다.
“중요한 건 그 애가 행복하다는 거요.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말이지.”
“그래 보여요.”
파커 씨가 엷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조금 쓰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차례 헛기침 후 파커 씨가 말을 이었다.
“만약 내 딸이 이 친구를 남자친구랍시고 데려왔다면 난 매우 탐탁지 않게 여겼겠지. 처음에는 말이오. 하지만 두 번, 그리고 세 번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요. 아, 이 녀석은 가능성이 있구나 하고. 경제적인 성공을 말하는 게 아니오. 이 녀석이라면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겠구나 하는 기대지요. 그게 왜 중요한 줄 아시오? 진정한 행복은 거기서 나오는 법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다소 어색해진 채로 네모에서부터 그녀의 아파트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그 짧은 시간을 틈타 그녀는 파커 씨에게서 받은 좋은 인상을 화두로 쉴 새 없이 얘기했다. 나는 건성으로밖에 들을 수 없었다. 나는 만약을 가정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만약 오늘 저녁과 같은 자리를 수지 큐와 가졌다면 지금쯤 상황이 달라졌을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가끔이지만 수지 큐가 커피 트럭에 들렀을 때 파커 씨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기는 했다. 거의 인사나 안부 정도가 전부였던 딱히 대화랄 것도 없는 대화. 두 사람 사이에 그 이상의 친밀한 또는 의미 있는 대화는 없었다.
한심하긴. 나는 계속 내 이별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고 있다. 처음에는 릭, 그다음에는 지미, 그다음에는 그녀. 이번에는 파커 씨, 그리고 다시 수지 큐까지. 문제의 원인은 자신인데도 끊임없이 뒤늦은 구실을 찾는 어린애처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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