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야 하는 원고의 진도가 좀처럼 안 나간다. 이럴 땐 산책을 하고 노천카페에서 커피와 담배를 즐기고 돌아온다. 그래도 충분치 않다 싶으면 책과 스팀잇으로 밤이 오길 기다린다. 이런 딴짓으로 귀찮은 작업을 무의식에 맡기는 것이다. 대체로 무의식은 그 일을 기대 이상으로 해내곤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 소식이 없다. 파업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 앉혀 놓고 물어 본다. 원하는 게 뭐냐?
ⓒ귀귀
아무래도 님이 며칠 전에 쓴 [별담수첩] 그 시절 놓친 영화, 접속. 1997作이 발단이었던 것 같다. 리뷰를 읽기 시작한 순간 불쑥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온 기억. 그래, 이건 그 시절의 내 첫사랑 얘기다...
...라고 거창하게 선언하고 싶지만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다. 먼저 첫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누군가를 열병이 날 정도로 좋아하는 것?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수많은 첫사랑은 짝사랑이 된다. 그런데 짝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견해도 많다. (여기서 짝사랑은 외사랑과 구분되는데 거기까지 논지를 확대하진 말자) 오고가는 감정의 교류가 있어야 비로소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수많은 첫 짝사랑은 첫사랑이 될 수 없다. 나는 이에 대한 판단을 여전히 유보 중이기에 결코 첫사랑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러니 무의식의 요구는 무시하기로 하자 :p 대신 여기까지 읽어준 여러분을 위해 한 가지 썰은 풀어 놓을 수 있다.
모뎀으로 통신사 서비스에 접속하던, 한밤중 가래끓는 소리로 온가족을 깨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파란 화면 속 텍스트 기반의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다리던 시절.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화방에서 영화나 음악 같은 시시콜한 주제부터 가족이나 친구, 학교처럼 보다 사적인 주제까지 많은 걸 공유하던 시절. 그 시절, 나는 두 소녀를 만났다.
까만 숏컷의 아이는 수줍음이 많은 소녀였다. 동갑내기였던 우리는 PC통신 어느 대화방에서 만나 친해졌다. 공통의 관심사, 서로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을 정도의 진지함. 서로에게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다. 우리는 곧 채팅을 넘어 전화와 음성사서함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디카가 보급되기 전이라 서로 얼굴도 모른 채 호감과 우정을 키워 나갔다. 차라리 전통적인 아날로그 펜팔이었다면 사진이라도 오고 갔을 텐데.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그래서 더 커졌는지도 모른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행위를 요즘은 밋업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번개라 불렀다. 처음 만난 날 우리가 본 영화가 바로 접속이다. 그것도 영화에 나온 바로 그 피카디리 극장에서. 내 인생 첫 번개였다. 그 만남 이후 그 아이가 내 음성사서함에 노래를 불러줬던 사실이 글을 쓰는 동안 기억났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때 그 만남이 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내가 그 소녀와 연락을 끊은 이유를.
온라인에서 시작된 만남이라고 해서 진지함이나 진실함이 결여된 건 아니었다. 그때 PC통신 유저들은 시대의 얼리어답터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끈끈한 유대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까딱하면 10만 원이 넘기 일쑤인 전화비로 인해(그리고 전화가 먹통이 되는 탓에) 가족들로부터 등짝 스매싱을 당하며 지켜온 유별남에 대한 긍지는 번개를 통해 더 단단히 다져지곤 했다. 나는 커뮤니티의 친목질을 경계하는 편이지만 지금의 스팀잇을 보면 그 시절이 어느 정도 오버랩되는 게 있어서 마냥 불편하지만은 않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그 좋았던 시절은 몇 년 후 인터넷선의 보급과 본격 채팅 서비스인 스카이럽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다.
까만 숏컷의 소녀는 그렇게 기억 속에서 완전히 묻혔다. 이터널라이트님의 글을 보기 전까지는. 잊혔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게서 잊힌 것들은 대개 쓸모없는 게 맞지만 때론 중요한 어떤 것들도 포함되곤 한다. 그렇다면 무의식이 나를 배려해 의도적으로 감췄다는 뜻이다. 무엇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 했을까. 의도적으로 그 소녀와 소원해졌다는 사실? 그런 나 자신에 대한 자기 혐오? 지나친 배려였다. 너는, 나는 그 시절 그 소녀를 기억해야 했다.
소녀에 관한 기억은 이렇게 싱겁게 끝난다. 여기까지 써 내려왔지만 나는 아직도 무의식이 이걸 왜 요구하는지 알 수 없다. 자기 반성? 그렇다면 좀 더 일찍 깨워주지. 왜 그 시절 그때가 아니라 지금이냐. 그게 아니라면 뭘까. 모르겠다.
의식이 최대한 재주를 부려 그럴싸한 마무리를 지어내려 하지만 큰 소득이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일을 잘했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도 않을 터. 의식이 무의식의 미려한 방식을 쫓아오려면 한참 멀었다. 두 번째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 무의식이 보내는 메시지를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의식이 무의식의 눈치를 슬쩍 본다. 오늘은 일단 이쯤에서 마무리해도 괜찮다는 것 같다. 모두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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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조건없는 파워 임대 덕분에 x10의 보팅이 가능해졌습니다! 상생을 위해 뉴비분들에게 먼저 기회가 돌아가는 점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