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스팀시티
지금, 2015년 8월 29일 저녁 8시 38분. 난 밤의 마레 지구에 있다. 오늘 밤은 토요일이라 펍이나 아이스크림 가게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큰 대로를 걷다가 건너편에 있는 인적이 끊긴 한산한 길을 본다. 컴컴하고 좁은 길에 문 닫은 상점의 쇼윈도우와 문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보인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난 건널목을 지나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한 지점에서 멈춘다. 특별할 것 없는 까만색 철문에 붙어 있는 흰 토끼 한 마리가 내 시선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토끼는 어느날 누군가가 흰 스프레이를 들고 무심하게 뿌린 원 안에 생겨났다. 그림을 그린 후 오려 붙였는지, 아니면 제작된 스티커인지 구분할 수 없다. 하얀 배에 11자를 문신처럼 새기고 오른손을 슬쩍 들어 따라오라는 표정을 짓는 이상한 나라의 토끼. 구름처럼 퍼지는 작은 꼬리와 삼각형 모양의 입을 한참 보고 있자니 이유를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거울나라로 간 앨리스에게 여왕은 이렇게 말한다.
"지난 일만 기억하다니 기억력이 형편없구나."
앨리스가 용기를 내어 물어본다.
"그럼 여왕님은 뭘 가장 잘 기억하는데요?"
여왕은 앨리스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아, 다음 주에 일어났던 일을 가장 잘 기억하지."
지금, 2018년 6월 20일 오후 1시 55분. 난 이상한 나라의 스팀시티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는 어디 있지? 과거와 미래는 아무리 노력해도 손으로 잡히지 않는다. 뇌세포마다 점화하는 전자기장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소환해낼 뿐이다. 과거는 미래만큼이나 모호하다. 물질화된 상태가 아니라서 결코 지금 경험할 수 없다.
파리 시내를 산책하다보면 곳곳에 뱅크시같은 스트리트 아티스트의 작품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토끼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 때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방금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2018년 6월 20일에 이상한 나라의 스팀시티에 관한 포스팅을 하면서 대문사진으로 써야하기 때문이다. 2015년 8월 29일에 내가 스팀잇을 알았냐고? 아니, 당연히 몰랐다. 그렇지만 내 미래기억은 알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잼을 달라고 여왕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여왕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네가 오늘 잼을 원한다고 해도 그건 가질 수 없어. 그게 규칙이지. 내일의 잼과 어제의 잼은 있어도 오늘의 잼은 없거든."
앨리스는 따진다.
"하지만 언젠가 '오늘의 잼'이 올 수 밖에 없잖아요."
여왕은 단호하게 말한다.
"아냐. 그럴 수 없어. 잼은 어제와 내일에만 나오지. 오늘은 어제나 내일이 될 수 없어."
과거와 미래는 둘 다 나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잼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왕처럼 미래를 기억하기로 했다. 2015년에 토끼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2018년에 그걸 스팀잇에 포스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2018년에 스팀잇에 포스팅했기 때문에 2015년에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어제 새벽 3시에 스팀시티가 궁금해서 촛불을 켰다. 미래의 스팀시티는 어떨까? 나는 촛불의 가장 어두운 심지에 두 눈을 고정하고 아무것도 없는, 그러나 모든것이 있는 보이드로 들어갔다. 작은 씨앗이 깜깜한 흙 밑에서 사과나무의 꿈을 꾸듯이 나도 스팀시티의 뿌리와 가지, 잎과 꽃과 단단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꿈꾸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미래기억이 또 하나 생성되었고 다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왔다.
캔들 포커스가 끝나고 나서 촛불 속에 날개를 펼친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건 스팀시티가 미래에서 보내준 징표였다. 스팀잇에서 문화의 꽃이 핀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이상한 나라의 스팀시티에 있는 당신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