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 4월은 나에게 견디기 참 힘든 달이었다. 죽음의 냄새가 정말로 짙게 깔린 달이었다. 이유 없이 사그러지는 죽음들이 가까운 주변에서 일어났고 그걸 바라보는 것이 정말로 견딜 수 없었다. 우리가 흔히 가지는 죽음의 이미지는 허상이다. 아무도 그 사람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순서도 없다. 나에게 닿아 겪은 죽음의 이미지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푸르스름하고 창백한 기운이 잠식해버린채 식어버린 육신, 그리고 또 하나는 여지껏 맞대고 있던 세계의 부재. 아무 연유 없이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돌연사나 의문사와 같이 사회적 맥락 안에서 정의되는 죽음들의 개념은, 정말로 그들이 왜 떠나야 했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나는 애써 죽음이 괴리되어 있는 세계를 상상한다.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을 뿐 정말로 영원히 떠난 것은 아닌 것이라 믿는다. 나는 불가지론을 선호하지만 그래도 신이 있기를 기도한다. 신과 신이 보듬는 모든 영혼의 세계가 있다고 애써 생각한다. 오늘 따가운 햇살을 맞으면서 나에겐 이렇게 또렷한 감각이 있는데, 죽음 이후에는 이러한 감각들이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가 스스로 물었다. 태아의 발생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기적인 시냅스의 연결과 신경 조직의 형성이 결국 자아를 구성하는 데에 일조하는 것에 슬퍼졌다. 이러한 관점에선 시냅스의 연결이 흩어지면 의식도 흩어지게 될 것이다. 비과학적 이야기지만, 영혼을 불어넣는 과정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기를 바라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몸의 활동이 정지하더라도, 그 너머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으니까. 죽음과 동시에 죽음을 인지할 수 있는 의식 마저 정지해버린다면 - 애초에 우주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멸해버린다면 오히려 이것은 죽음을 자신의 일로 바라보며 맞이하는 입장에서 그리 담담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오롯이 살아남은 자의 몫일까.
흔히들 이야기하는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는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자들의 관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있는 자들의 관찰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죽음의 5단계는 애초에 경향성만 가질뿐 부정-분노-타협이 항상 순서대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타협을 했다가 다시 부정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감정들을 아주 큰 덩어리로 보았을 때, 서서히 넘어가는 것처럼 보일 뿐. 이마저도 천천히 죽음을 대비하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급작스러운 죽음은 애초에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죽음은 죽음을 맞이하는 자와 죽음을 곁에서 바라보는 자 모두에게 비극이다.
해마다 4월이 되면, 이따금씩 몇몇 사람들의 생애가 생각이 난다. 나와 마주한 삶의 기간은 나의 생애에서도 그들의 생애에서도 그리 길지 않았겠지만, 나는 또렷하게 그들을 기억하고 되새김한다. 살고 있는 자의 천형은 이러한 것이다. 사진첩을 들추어보니 여전히 몇몇은 웃고 있다.
그래. 네 녀석은 잘 있느냐. 너를 추억하는 우리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있고 이제는 자주 너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떠올리곤 한다. 선생님들께서도 그 곳에서 잘 지내고 계신지요. 생각보다 선생님들 그 때 많이 젊으셨더군요. 조금 있으면 저도 그 나이 또래 다 되어 갑니다. 남겨주신 사진들도 가끔씩 잘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사진을 좋아하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이제,
4월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