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꿈은 제각각의 이유로 색을 잃는다. 꿈을 충분히 구체화 하기도 전에 지레 겁 먹고 포기하기도 하며, 구체화 된 꿈을 좇고 있었음에도 현실의 벽에 막혀 타협하는 사이 꿈이 변질되기도, 꿈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슴 속에 묻어둔다. 하지만 가슴 속에만 품고 있는 꿈은 결국, 꿈으로 남을 뿐이다. 거창한 꿈 대신, 현실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행복한 현실의 희생하며 좇을 가치가 있는 꿈은 없다며 꿈을 내려놓는다.
사회는 누군가에게는 특별히 가혹하다. 가끔은 신념을 지키고 죽어가거나, 신념을 버리고 살아남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신념을 버리고 사회와 타협한 이들에게는 끝없는 인지부조화가 찾아온다. 그 끊임 없는 인지부조화는 그들을 갉아먹는다. 그들의 순수함은 왜곡되고, 그들은 사회와 타협한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자신은 사회와 타협한게 아니며 '성장한' 것이며 '어른이 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꿈을 버리는건 하나의 신고식으로 기능한다. 혹독한 신고식은 충성심을 만들어낸다. 소중한 꿈을 포기해가며 살아남은 '사회의 일원'이라는 칭호는 소중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꿈을 희생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아야 할 칭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의 일원'들은 꿈꾸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내비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가혹한 사회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이들은, 꿈꾸는 이들에 대해 반감을 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다. 자신들은 꿈을 포기하고 어른이 되었기에, 꿈꾸는 이들을 어린아이에 놓는다. 피터팬이라 부르기도 한다.
피터팬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이다. 아이들만의 공간인 네버랜드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에는 환상의 공간인 네버랜드는 없다. 피터팬이 웬디에게 어른이 되면 네버랜드에 올 수 없다며 경고하듯, 사회는 꿈을 품은 이들에게 꿈을 버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며 경고한다. 현실에 꿈꾸는 이들이 숨을 곳은 없다. 꿈을 버린 사람들이 꿈을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꿈꾸는 이들도 살아간다. 꿈꾸는 이들은 피터팬처럼 네버랜드에 숨어사는 도망자들이 아니다.
꼭 꿈이 있어야 하는건 아니다. 꿈을 포기한 사람이 비겁한 것도 아니다. 꿈이 없는 사람도, 그 나름의 행복이 있다면 충분할 일이다. 꿈을 잃은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꿈꾸는 이들이다. 끊임 없이 경고하는 사회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세상을 바꿀 이들을 피터팬이라 부르지 말자. 차라리 반항아라고 부르는건 어떨까. 단, 경의를 담아서.
님의 제 1회 PEN클럽 공모전이 마감되었습니다. 이제 심사를 해야하는데 78편... 거의 다 읽긴 했는데 심사를 위해서는 여러번 읽어야겠죠. 참가자 여러분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