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발레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그 마음이 옅어지기 전에 얼른 준비를 시작했다. 예쁜 운동복도 사고, 양말도 사고, 짐에 들고 다닐 에코백도 마련해놓고. 장비를 구비하는 데만 해도 3일은 넘게 걸렸으니 일단 작심삼일은 넘었다. (아닌가?)
옷은 준비됐으니 이제 운동만 하면 된다. 어떤 운동을 해야할까. 짐에서 제공하는 무료 운동 강좌 스케줄을 훑어봤다. 요가를 듣자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필라테스도 해보고 싶었다. 아니면 줌바를 다시 해볼까. 이번엔 내 취향에 맞는 음악을 틀어줄지도 모르는데. 오호라, 이 강좌에서는 70~80년대 음악을 틀어준다네? 내가 아는 노래들 많겠군. 최신곡을 모르는 아줌마라... 아니면 근력운동을 할까? 하루만에 나가떨어지진 않을까? 수많은 운동 강좌를 살펴보던 중 내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었다.
성인 발레 강좌. adult ballet
발레는 무슨. 근력 키우기도 모자란 판에. 게다가 유연성도 없는 막대기면서, 내가 무슨 발레. 요가나 필라테스면 몰라도, 발레는 좀 그렇지 않아? 다행히 성인 발레는 발레복을 입는 건 아니구나. 그냥 운동복 입고 해도 되고, 발레 슈즈도 필요 없고. 발레 치마 안 입는다고 실망한 건 아니야. 어차피 들을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발레 초보자도 환영한다고?
뜯어말리는 이성과는 달리 내 마음은 벌써 우아하게 포즈를 잡는 발레리나의 모습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무슨 발레
망.했.다.
그놈의 호기심은 기어코 나를 발레 클래스로 이끌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루가 깔린 넓은 교실이 보였다. 세 개 벽면이 온통 거울로 둘러싸여 있어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들어서는 내가 세 명이나 보였다. 교실의 한쪽 벽에는 말로만 듣던 발레 바(barre)가 허리 높이에 길게 붙어 있었다. 왠지 발레리나들을 흉내내야 할 거 같아서 앞머리를 실삔으로 고정시키고, 뒷머리는 동그랗게 말아 똥머리를 만들었다. 거울을 힐끗 봤다. 전~혀 발레리나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냥 똥머리 한 중년 아줌마였다.
다행이었다. 교실 문을 열고 속속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니 그나마 내가 젊은 축에 속했다. 게중에는 할머니들도 계셨다. 이번에 처음 왔다는 사람, 어릴 때 해본 게 다라는 사람, 우아하게 춤추는 게 좋아서 온다는 사람. 각양각색이었다. 뭔가를 새로 배운다는 건 참 설레면서 좋은 기분이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행복한 감정인가.
불행히도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발레를 하나도 할 줄 몰라도 상관없다고 안심시키는 듯하더니, 곧이어 이 클래스는 중급(intermediate)이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이미 지난 일 년동안 성인 발레 강좌를 꾸준히 들어온 사람들이 교실에 반 이상이었다. 아, 나 잘못 들어온 걸까?
선생님이 핸드폰으로 음악을 켜면서 준비하라고 말했다. 뭘 준비하지? 이전에 강좌를 들어왔던 사람들이 사사삭 옆으로 빠지더니 벽에 붙어 있는 긴 발레 바(barre)를 한 손으로 잡고 서기 시작했다. 한 박자 늦게 그곳으로 향했지만 이미 자리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교실 중앙에 놓여 있는 포터블 바(portable barre)를 붙잡고 섰다. 나처럼 굼뜬 몇몇이 내 뒤에 숨듯이 와서 섰다. 발레의 ㅂ도 모르면서 하필 교실 한 가운데, 그것도 맨 앞에 서게 됐다. 정면의 거울에 긴장된 내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망했다.
발레 바(ballet barre)를 붙잡고 선 귀여운 아이들.
드미, 쁠리에, 아 그리고, 뭐라굽쇼?
선생님은 말이 무척이나 빨랐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난 미국에 살고 있다. 고로 이 수업은 영어로 진행된다. 선생님은 자기 말이 빨라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로 계속 빨리 말씀하셨다.
무릎 굽혀다가 펴고, 발 뒤꿈치 들고.
팔은 위로, 앞으로, 이번엔 옆으로.
발등을 펴고, 꺾고, 다시 발등을 펴고, 1번 발.
드미, 쁠리에, 아 그리고, 뭐라굽쇼?
그랑 쁠리에! 우아하게 올라오고. 이번엔 반대 방향!
나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선생님을 열심히 흉내냈다. 발레 용어를 하나도 몰랐기 때문에 1번 발이 뭔지, 2번 발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쁠리에고 나발이고 간에 무작정 선생님만 따라했다. 어설픈 내 동작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이는 전면의 거울을 애써 무시하면서.
벽에 붙어 있는 바(barre)는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내가 붙잡고 선 포터블 바(portable barre)는 내가 중심을 잃을 때마다(그러니까 거의 2초에 한 번씩) 끼익, 끼이익,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사람들이 다들 벽으로 붙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아, 나 이거 계속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