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면서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꽤 많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대개는 직업으로 자기소개를 합니다. 그게 가장 간단하면서도 객관적이니까요. 회사를 다닐 때는 저를 소개하는 일이 쉬웠습니다. 그냥 "회사 다녀요."라고 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회사를 그만두고 나자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일을 안 한건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했던 일이 단어 하나로 딱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영어와도 관련돼 있고, 글쓰기도 하고. 남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도 왠지 구차하고, 어차피 벌이도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누가 물으면 자조 섞인 농담으로 "백수"라고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보게 됐지요.
극 중 키보디스트로 나왔던 이나영('전경' 역할)이 이동건('한동진'기자 역할)에게 했던 대사입니다.
난 누가 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음악 한다고 해요.
티비에 나오냐고 물으면, 아직 앨범도 못 냈다고 얘기해요.
그럼 사람들은 딱하게 보거나 한심하게 봐요.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음악을 한다는 건 내 직업이니까요.
...
내 직업은 한동진 씨 애인이 아니라 밴드 키보디스트에요.
난 그걸 많은 사람한테 알리고 싶어요. 내가 참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음악 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가 참 멋졌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알리고 싶다는 마음까지도요. 저도 그녀를 따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누가 직업을 물으면 백수라고 대답하는 대신 "프리랜서 작가예요."라고 말했죠.
자기를 소개한다는 건 참 신기한 일입니다. 남들에게 나에 대해 알려주는 일이지만, 오히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기도 하거든요. 우리는 모두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멋대로 해라>에 나왔던 전경(이나영)을 예로 보자면, 그녀는 딸, 여자, 한동진 애인, 키보디스트 등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지요. 그중에 그녀는 '한동진 애인'이 아니라 '밴드 키보디스트'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선택합니다.
내가 나를 어떤 모습으로 보는지에 따라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뀝니다. <연금술사 (The Alchemist)>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He realized that he had to choose between thinking of himself as the poor victim of a thief and as an adventurer in quest of his treasure. "I’m an adventurer, looking for treasure," he said to himself.
그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도둑에게 가진 것을 털린 피해자로 볼 것인지, 보물을 찾아 떠난 모험가로 볼 것인지. "난 모험가야, 보물을 찾아 나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보물을 찾아 나섰지만 도둑을 만나 가진 것도 뺏기고, 시간만 허비하게 된 주인공.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모험가"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선택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무릎을 쳤습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정말로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저는 다시금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리랜서 작가'는 저를 제대로 표현해주고 있지 못했거든요. '프리랜서'라는 건 매여있는 직장이 없다는 것뿐이지요. '작가'라는 말도 '글작가'인지, '그림 작가'인지, '사진작가'인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요.
사실 '직업'으로 나를 소개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만큼 커다란 단점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직업'이 없을 때는 나를 소개할 말도 찾지 못한다는 겁니다. 구직, 이직, 창업 준비, 시험 준비, 해고, 출산, 육아, 유학, 명예퇴직 등 다양한 이유로 '직업'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직업이 없다고 해서 나의 정체성까지 흔들리면 안 되지요. 직업이 있든 없든,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를 진짜로 표현해줄 말을 찾아야 했습니다. "음악 해요"라고 하던 전경처럼, "난 모험가야"라고 하는 주인공처럼.
고심 끝에 저는 저를 소개할 말을 찾았습니다. 제 스티밋의 소개글에도 쓰여 있는 말이죠.
책과 영어와 글쓰기를 사랑하는 Bree입니다.
물론 사람들을 직접 만났을 때는 이렇게 소개 안 합니다. 오글거리니까요. 하지만 글을 쓸 때면 이 문장으로 저를 소개합니다. 제가 어떤 직업을 가졌건, 직업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저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니까요. 그 문장이 제가 선택한 저의 정체성입니다. (간략하게 줄인 버전으로 "글 쓰고 책 읽는 Bree입니다"라고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책 읽고 글 쓰는 Bree"가 더 입에 달라붙긴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마치 "책에 대해서만 글 쓰는"이 되는 것 같아서 "글 쓰고 책 읽는"으로 순서를 바꿨습니다. ^^)
만나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저는 다른 말로 저를 소개합니다. 남편 회사 동료를 만나면 "누구누구 와이프", 아이 친구에게는 "아줌마", 아이 학교 선생님에게는 "누구누구 엄마". 저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어떤 이들은 "작가님"이라 부릅니다. "브리님"이라고 불러주시는 분들도 계시죠.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줌마건 선생님이건 작가님이건 상관없이, 저는 언제나 책과 영어와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