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직접 고른 것도 아닌데, 평생을 따라다니는 이름. 단지 몇 개의 글자에 지나지 않지만, 이름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소꿉놀이 동무가 같이 놀자고 부를 때도, 시험을 치를 때도, 학위를 받거나 결혼을 할 때도 이름은 항상 거기에 있다. 평생토록 우리의 삶에서 온갖 대소사를 함께 하다가, 때로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살아남아 후세에 전해지기도 한다. 누군가의 명예가 실추되면 ‘이름이 땅에 떨어졌다’고 하고, 공적을 쌓으면 ‘이름을 날렸다’라고 한다. 이처럼 이름은 그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다. 이름이 그 사람을 대신하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이름이 또 다른 나, 또 하나의 자아라고 생각한다. 마치 나의 분신처럼.
첫 번째 분신술, 실패
대학 시절 나는 이름을 새로 지어야 하는 상황에 부딪혔다. 영어회화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미국인 선생님은 학생들의 한국 이름을 발음하거나 외우기 어렵다며 모두에게 영어 이름을 지어오라고 했다. 영어 이름 짓는 것과 영어를 잘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시키시니 모두들 영어 이름을 지어왔다. 교실에는 데이비드와 마이클, 에이미와 씬디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영어 이름을 짓지 못했다.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나도 영어 이름을 지어보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내 이름 같지가 않았다. 또 다른 자아, 나의 분신 같지가 않았던 거다. 내가 엘리자베스인가, 샬롯인가. 내가 레이철인가, 메리인가. 수많은 이름을 떠올려봤지만 나는 끝끝내 영어 이름을 짓지 못했다. 교실에서 유일하게 영어 이름을 짓지 않은 나를 선생님은 못마땅하게 여기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분신술은 실패했다.
두 번째 분신술, 절반의 성공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일을 할 때였다. 영어와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외국인과 접할 기회가 많았고, 그 외국인들의 편의를 위해 영어 이름을 지으라는 윗선의 지시가 내려왔다. 젠장, 또 영어 이름이다. 내 주위의 동료와 사수들은 모두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앤디, 제니퍼, 쉐넌, 제니, 린… 이번엔 나도 피해갈 수 없었다. 회사를 다니는 한 영어 이름을 지어야 했으니까. 나는 다시 머리를 싸매고 나에게 딱 맞는 영어 이름을 찾아 헤맸다. 주위 선생님들의 권유로 Sharon을 선택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국인이 나를 보며 Sharon이라고 부를 때마다 마치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Lena로 바꿔봤지만, 그것 역시 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 Lena란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왜 이 낯선 Lena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 영어 이름을 꼭 지어야 했기 때문에 엉겁결에 분신술을 시도하긴 했지만, 그건 절반의 성공이었다. 내가 만든 분신은 전혀 나 같지 않았다.
드디어 분신술 성공
한참 방황하고 고민이 많던 시기에 틱낫한 스님의 책들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 ‘나와 이 세상/온 우주가 둘이 아니고 결국 하나다. 나와 너는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설법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다르지 않다, 둘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불이(不二)’라는 이름을 지어서 필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낯선 이름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법명이냐, 눈이 부리부리하냐, 새의 부리냐’ 하면서 이상하다고 했지만, 내가 뜻을 넣어 직접 지은 이름이었기 때문에 나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또 하나의 자아, 나의 분신처럼 느껴졌다. 스스로를 ‘불이’라고 칭할 때도, 누가 나를 ‘불이’라고 부를 때도 그게 원래 내 이름이었던 것처럼 몸과 마음에 착 달라붙었다. 드디어, 분신술 성공.
내친김에 영어 이름도 짓다
인터넷 필명을 지은 것만으로도 몹시 흡족했기 때문에, 또 다른 분신이나 영어 이름은 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분신을 또 하나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워낙 영어를 좋아하고 외국인과 영어로 얘기할 기회가 잦다 보니 내 본명보다 발음하기 편한 영어 이름이 필요했다. 나는 쉐론이나 레나 같은 낯선 영어 이름을 새로 짓는 대신 이미 가지고 있던 필명 ‘불이’를 영어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불이’를 영어로 표기하기가 어려웠다는 거다. Buli라고 쓰면 bully (불리 – 남을 괴롭히는 사람)처럼 발음이 돼서 싫었고, Buri라고 하니 bury에 익숙한 미국인들은 ‘베리’라고 발음을 했다. 그렇다고 Boori라고 적자니 글씨가 너무 안 예뻤다.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결국 ‘불이’와 가장 발음이 비슷한 Bree(브리)에 안착을 했고, 그렇게 내 영어 이름은 Bree가 됐다.
이름이라는 분신술
연예인들은 데뷔를 할 때 종종 예명을 지어서 활동을 한다. 단순히 많은 이들에게 쉽게 기억되고 싶어서 짓는 경우도 있겠지만, 예명은 일반인으로서의 자기와 연예인으로서의 자신을 구분하고, 무대에 서거나 카메라 앞에 설 때 공연에 적합한 또 다른 자아를 내세우는 아주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연예인만 이름을 새로 지으라는 법은 없다. 예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도 살면서 이름을 지어야 할 때가 있다. 이메일 주소를 정할 때도 필요하고, 인터넷 카페에서는 닉네임(별명)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으며, 요새는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주신 이름과 달리, 이런 이름은 자기가 직접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성격이나 성향, 기호, 가치관 등을 참고해서 만들 수 있다. 홍길동처럼 도술을 익히거나 손오공처럼 털을 뽑아서 훅 불지 않더라도, 너무나 편리하게 이름이라는 분신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도 외딴 오지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미 분신술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게 영어 이름이건, 인터넷 카페 닉네임이건, 스티밋 아이디건간에 자신만의 분신, 마음에 쏙 드는 분신을 만드셨길 바란다.
안녕하세요, 글 쓰고 책 읽는 Bree입니다.
님께서 300 팔로워 기념으로 하시는 이벤트에 당첨이 돼서 이렇게 귀하고 멋진 선물을 받았습니다.

글을 읽으셔서 아시겠지만 제가 Bree라는 이름을 한글로 "불이"라고 쓰고 있거든요. (물론 '브리'라고 불러주셔도 상관없습니다. ^^)
불이(不二)는 "세상 모든 것이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은 모두 하나다. 둘이 아닌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이 우주 안에서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며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너와 내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싶어 지은 이름이지요.
그 이름을 이렇게 멋지게 써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 한가득입니다.
님의 정성과 에너지가 듬뿍 담긴 글을 받았으니, 앞으로 저도 많은 분들께 좋은 에너지를 선사하는 글 쓰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