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곡을 쓸 때 피아노 없이 하려 합니다. 피아노로 곡을 쓸 때 나오는 몇 가지 단점이 있는데요. 가장 큰 단점은 손에 익숙한 패턴이 나오는 것입니다. 평소 즐겨 연주하는 코드 진행이나 습관적인 멜로디, 자주 잡는 코드 모양(Voicing)이 불쑥불쑥 나오기 때문에 곡의 독자성이 사라져요. 또 지극히 피아노다운 멜로디가 나오는 것도 단점입니다. 피아노에서 연주하던 멜로디를 다른 악기로 옮겼을 때, 잘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점만 있는 건 아니고, 장점도 있습니다. 오늘 제게 이 장점이 꼭 필요해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곡을 빨리 쓸 수 있다.
피아노를 치면서 곡을 쓰면 곡을 무척 빨리 만들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30분 안에도 곡 하나를 금방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다만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게 문제지요.
오늘은 시간에 쫓기는 관계로 관습적인 멜로디와 손에 익은 코드 진행의 덕을 좀 보기로 했습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마음에 드는 곡이(연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급하다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곡을 보낼 수도 없어 답답할 때쯤, 오랜만에 챙겨온 노트에 눈이 갑니다.
요즘은 악보를 그려야 할 때 프로그램을 이용하거나 A3 사이즈 오선지에 악보를 그리곤 합니다. 그렇다 보니 음악 노트를 쓴 지도 꽤 오래됐어요. 오늘 가져온 노트는 2013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서 샀던, 저의 작곡 노트입니다.
2013년부터 썼던 곡들을 기록한 노트에요. 이 노트에는 집중해서 썼던 곡보다는 손버릇처럼 나온 곡, 금방 써진 곡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버리긴 아깝고, 어디에 쓸 수는 없는 곡들을 정리해둔 노트에요. 마음이 급해져 예전에 썼던 곡들을 하나씩 쳐봅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급하게 곡이 필요할 때 이 노트에서 도움을 받곤 했습니다. 어딘가 뻔하게 느껴지지만, 가끔은 그런 게 필요할 때도 있거든요. 또 쓸 때는 별로였는데, 다시 보니 좋은 경우도 몇 번 있었습니다.
마음이 급해 첫 장부터 하나하나 살펴봤습니다. 몇 개는 이미 차출돼 발표된 것도 있고, 언제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곡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곡 중에 한 곡 정도 제가 쓰려는 곡과 비슷한 게 있었어요. 그래도 몇 년 전에 썼던 곡을 쓰는 게 마음에 걸려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곡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5년 전에 썼던 곡들을 다시 돌아보니, 지난 5년간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았어요. 오히려 그때 썼던 곡들이 더 좋게 느껴지더라고요.
당시에는 버리기 아까워 그려놓았던 건데 노트를 넘기다 보니, 언제라도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어떻게든 곡을 쓰려 애썼던 5년 전 제 모습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요즘은 일이 아니면, 곡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찌 됐건 어디서든 매일 곡을 쓰라던, 스승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흔한 멜로디라도, 뻔한 코드 진행이라도 매일 갈고 닦으면 언젠가는, 혹은 어느 장소에서는 좋은 곡이 되겠지요?
다행히도 곡은 새로 만들었고,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살을 붙여가면서 그냥저냥 봐줄 만한 곡은 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종일 작업만 했는데요. 저는 이상하게도 저를 괴롭히며 몰아서 하는 작업이 참 좋습니다. 머리는 깨질 것 같지만, 기분은 무척 상쾌하네요.
이제 좀 쉬고, 내일부터는 반쯤 남은 이 노트를 다시 채워가려고요.
이 노트를 보면서 쏠메()님이 글 아래 덧붙이시는 문구가 생각났습니다.
영감이란, 매일 일하는 것이다. -사를 보들레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