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치 미츠루의 대표작이라 하면 역시 'H2'(1992)가 떠오를 것이다. 다양한 스포츠 만화를 그리긴 했으나 그의 전성기는 확실히 야구를 그릴때였다. 20년간의 작가 생활을 거쳐 드디어 완성 단계에 이른 독특한 미학. 일본 프로 야구의 높은 인기. 아다치 미츠루의 'H2'는 이러한 흐름을 타고 한 시대를 풍미하는 대표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최고의 작품을 묻는다면 역시 <러프>(1987)다. 수영과 다이빙이라는 비인기 종목을 다룬데다 아다치 미학이 완성되기 전의 작품이라는 점, 게다가 소장판본으로 여섯 권에 지나지 않는 짧은 분량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들이 그 제목과(Rough) 공명을 일으키며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내가 이 만화를 소장판으로 갖고 있는 이유다.
주인공 니노미야 아미와 야마토 케이스케는 할아버지 대에 철천지 원수가 된 두 집안의 후손이다. 원수가 된 사연은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어릴 때부터 줄곧 원수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니노미야는 야마토 케이스케를 살인자로 여기며 성장한다. 그런 두 사람이 공교롭게 한 고등학교에서 만난다. 그것도 다이빙부와 수영부. 모른척 하고 살래야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지척의 관계로 말이다.
기회만 오면 확실히 복수할거라 다짐해왔건만 막상 만나고보니 마음은 이상하게 꼬여만간다. 야마토 케이스케와 니노미야 아미는 둘 다 예쁘고 잘생긴데다 착하기까지한 완벽한 남녀였다. 얽히고 설킨 학창 생활 속에서 니노미야 아미를 덮고 있던 분노의 껍질이 하나씩 하나씩 깨져나간다. 그 속에서 멋쟁이 동급생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건 당연한 말씀. 상황은 케이스케 쪽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를 살인자로 부르며 미운 짓만 골라하는 여자애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부인할 수 없다면, 그 아름다움에 굴복하는 것이 바로 남고생의 특권이자 의무 아니던가?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엔 사연 많은 집안 사정보다 더 큰 장애물이 있었으니 바로 나카니시 히로키라는 남자의 존재였다.
나카니시 히로키는 일본 최고의 수영 선수이자 어릴 때 부터 아미의 결혼 상대로 지목되어온 남자다. 케이스케의 할아버지 때문에 니노미야 집안이 힘들었을 때 도움을 줬던 게 나카니시 집안이었고 그런 인연으로 두 집안 사이에는 자연스런 혼담이 오갔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아미는 나카니시 히로키와 결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겐 야마토 케이스케라는 특별한 일이 생겨버렸다.
나카니시 히로키는 소년이 남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파도였다. 파도는 최고의 수영 선수가 되고 싶다는 소년의 꿈과, 이제 막 가슴을 울리기 시작한 사랑을 산산히 부숴버리기 위해 전진한다. 그저 동경의 대상이었던 존재를 라이벌로 맞아야 하는 소년의 무참함은 위로 받을 길이 없다. 그러나 야마토 케이스케는 그 무참함을 딛고 파도를 향해 자신의 스트로크를 뻗는다. 비록 작고 보잘것 없더라도, 기어이 파도를 넘어 저 쪽 대지에 닿겠다는 일념과 함께.
아다치 미츠루는 과감한 침묵과 함축적 암시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침묵 속에서 말을 찾고 암시 속에서 의미를 밝혀야 하기에 그의 작품은 천천한 음미를 통해 서서히 스며든다.
침묵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곰곰히 들어보면 거기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지 알 것이다. 나는 때때로 아다치의 작품이 그림으로 그려진 하이쿠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대사가 생략된 컷들엔 대사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고 툭 던진 말 한마디엔 수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말하지 않은 것을 느끼는 게 이 만화의 재미라면, 느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아다치 미츠루 미학의 백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