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매가 방문을 여시면 보이는 맞은편 산과 하늘.
마지막으로 외할매 혼백이 살던 집을 둘러볼 때, 찍었다.
이곳으로 시집 와선 80여년 넘게 저 풍경을 일상적으로 바라보며 희노애락했을 외할매.
7일 오전 11시 무렵 왕래가 별로 없는 막내외삼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가 전화를 안받는다며 오늘 오전 9시 ~ 10시 사이에 외할머니가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엄마한테 알려 드리라고.
일할 땐 핸드폰을 거의 안 들고 다녀서 엄마 직장으로 전화를 해서 집에 급한 일이 있으니 아들한테 전화 부탁한다고 하니, 잠시 뒤 전화가 왔다.
"외할매가 오늘 오전 10시경에 돌아가셨어", 쳐지던 엄마의 목소리.
22년 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9년 전엔 외할머니를 모시던 장남인 큰외삼촌이 돌아가시자 외할매는 맞며느리와 단 둘이서 외갓집에 살게 되셨다.
엄마는 외할매가 마음이 쓰였지만 가난한 집안에 시집 와 남편도 일찍 여의고(엄마 나이 당시 38세) 홀로 세 자녀를 키우느라 정신없어 외갓집에 잘 가보지도 못했다.
OO장례식장으로 외할머니를 옮겼다는 말을 듣고 엄마와 난 우선 엄마집으로 갔다. 집으로 오시자마자 엄마는 부엌으로 가선 정한수 한 그릇을 뜨서 상 위에 올려놓고 기도를 하셨다.
엄마는 누나 둘을 시집 보내고, 내가 직장을 구한 뒤부터는 여유가 생겨, 일거리가 없을 땐 일년에 한 두 번씩 외할매를 우리집에 모시고 와서 한 두 달 같이 보내곤 했다. 외할매와 식사를 할 땐 항상 큰소리가 오가는 풍경이 연출되곤 했다.
외할매가 연로하여 보청기도 별 도움이 안 된 것이 두 번째 이유고, 첫번째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가난하다고 여기시는지 밥 많다고 들어내려 하고 외할매 숟가락 위에 엄마랑 내가 반찬(고기나 생선 등)을 올려 드리면 또 너희들 먹으라 하시니 남들이 보면 싸우는지 알 것이다. ㅎㅎ
외할아버지와 큰외삼촌이 돌아가신 후 나이는 100세를 향해 가는 데 죽지 않고 며느리한테 천덕꾸러기 취급 받으며 사는 게 마음에 쓰여서일까?! 그랬겠지?! (자식들한테 속내를 털어 놓을 수도 없는 심정. 엄마 말고는 잘 찾아오지도 않는 자식들이었으니. 엄마도 아빠를 일찍 여의어 외할매를 찾아보기도 수월하고 외할매의 심정을 더 잘 이해해서이기도 하겠지?!)
카메라를 사서 외할매를 찍어려고 하면 귀신 다 돼 가는데 뭐하려고 찍느냐며 외할매는 고개를 돌리고, 찍지 마라고 큰소리를 내시곤 했다. 그래도 내가 나중에도 계속해서 계속 찍으면 웃으셨는데. 그 사진을 영정에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엄마는 그 사진 가지고 있냐며 한 번 물었지만, 그 사진은 영정에 쓰이지 않았다.
곧 귀신된다고 할 때 외갓집에 다시 데려다 드리면 내가 어여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난 "외할매! 뭔 소리를 하냐고?" 나무랐던 쓸쓸함.
우리집에 자주 놀러온 게 어느 정도 익숙해서인지 외할매는 엄마보고 언제 날 데리러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가 우리집에 모시고 갈 때 왠지 외할매가 젊어 보였다.
엄만 2남 3녀중 넷째며 막내딸이다. 막내딸이 일찍 남편을 잃고 가난해서 항상 걱정했다며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엄마는 서럽게 우셨다.
영정 사진은 외갓집에 붙어있는 저수지 둑방 앞에서 하얀 한복을 입은 모습을 아래에서 위로 찍은 모습이었다. 외할매 방엔 저 사진과 외할배의 독사진이 액자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세 딸들보다 고운 외할매의 모습이 주름살 속에서 은은히 비쳤다.
외할머니라고 하니 친근함이 없다. 조부모를 부르던 호칭은 할배, 할매, 외할아버지(외할배라고 부른 기억이 없네), 외할매였다.
어릴적 엄마아빠가 맞벌이를 했기에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으면 외할매는 우리집에 와선 동네 골목에까지 나를 찾으러 와 집에 데리고 가선 거칠고 두터운 손으로 낯을 씻겨주신 기억이 외할매와의 첫 기억일까.
내가 조금 더 자라서는 우리집에 오신 외할매한테 물어서 엄마의 어릴적 모습(갓난 아기일 때 화로에 앉았다가 죽다살아난 이야기, 엄마의 엉덩이에 흉터로 남았다)과 한국전쟁 때 피난(하루 정도 피난갔다가 다시 돌아가니 지붕 한 가운데가 폭격 당해 내려앉았다고) 등 옛날 일들을 물어서 듣는 게 재미있었다.
아빠가 내 열 살 때 돌아가셔서 그런지 그 공백을 이야기로 메꾸려는 경향이 있다. 아님, 단지 이야기를 좋아해서인지 모르겠지만(군제대후부터의 독서목록들은 뭐, 거의 논픽션이지만). 친할배가 돌아가셨을 때 난 이튿날째 옆집에 혼자 사시는 이웃집 할머니에게 우리 큰집 예전 얘기를 물었었다. 친할매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그때가 할매, 할배, 아빠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것일까. 몇 년 뒤 그 이웃집 할머니는 자식들 집으로 떠났다.
동네에서 글을 가르치셨던 외할아버지가 내가 글을 알고 있으니 외할매는 몰라도 된다고 해 평생 글을 모르셨던 외할매. 그래서 날씨 뉴스를 보면 비그림을 보면 빙그레 웃으시며 내일 비오나라고 쉰듯한 소리로 말씀하시던 모습.
외할매는 치매를 예방하시려는지 화투를 꺼내서 느리게 화투장을 맞추곤 하셨다. 여름 어느날 거실에 엄마랑 누워 있을 때였다. 외갓집에 외할매를 다시 모셔다다놓고 와선 외할매가 잘 돌아가셔야 할텐데, 외숙모한테 천덕꾸러기... 감정이 울컥하는지 엄마가 눈물을 얼른 감추는 모습을 보았다.
외할매가 하관하는 날은 날이 찬데 바람이 불어서 제법 추운 날이었다. 외갓집에서 가까운 뒷편 산 외할아버지 옆에 나란히 외할매도 양지 바른 곳에 누우셨다.
외할매! 잘 가! 춥고 쓸쓸해서 소주를 몇 잔 걸치고 술기운이 도는 가운데 서둘러 내려왔다.
겨울철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면 곱은 손을 뜨거운 물에 담그면 언 손이 풀리던 그 느낌. 뭔가 따뜻하면서도 아리고 서글픈. 외할매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