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 이별구경
"오라고 해. 아니 얼마나 힘들면 여기까지 오겠다고 하는 거야. "
친구와 함께하는 저녁에 친구의 친한 동생, 얼굴도 한번 안 본 25살 남자A가 달려오겠단다.
자초지종은 여자친구랑 헤어진 지 6개월이 넘었는데, 개강해서 다시 보게 됐고.
간신히 억눌렀던 가슴 한쪽이 터질 것 같아 도저히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거였다.
상황은 친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막상 남자A가 친구의 전화기에 대고 하는 말은
"죽을 거야" "자살한다, 나"
"또 걔랑 마주치면 진짜 죽을 거야" 정도였다.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실연이 실언을 낳은 거라지만. 도대체 목숨이 몇 개이길래 그렇게 계속 죽겠다 하는 것인지.
상황이 딱해 보여 친구의 수화기 너머의 다급한 목소리를 집으로 오라고 했다.
설마 오겠어 하는 마음이었는데 남자A는 한 시간도 채 안 돼 왔다. 진짜 왔다.
집 문을 열면 인신매매범들이 튀어나와 납치라도 해가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왔나 싶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게도 이별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을 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가 무서운 겁쟁이로 만드는 것이 잔인한 실연이었지.
일단 앉으라고 자리를 내주고 눈을 마주친 남자 A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멀끔하고 멋있는 아이였다.
대역죄인 것처럼 어깨 하나 제대로 펴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 어색할 만큼.
"우리가 들어줄 수는 있어. 처음 보는 사이라 내가 불편하지만 않다면"
"몰라요, 전 그냥 이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날 것 같아요. 너무 두려워요."
남자 A 입에서 1년 전쯤 내가 했던 말이 튀어나오다니. 갑자기 더 흥미로웠다.
"왜 그렇게 생각해?"
"걔만큼 예쁘고 좋은 애가 나타날까요? 그리고 나타나더라도 그 애가 날 좋아할 보장은 없잖아요.
이렇게 아픈 거라면 사랑, 그거, 안 할걸 그랬어요."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25이구나 싶었는데.
아차차, 이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준비되지 않은 헤어짐에 무방비로 얻어맞으면 누구나 다 저런 모습일 거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자퇴할 거예요. 학교도 때려치우고. 숨어서 살 거란 말이에요. 난 망했어요"
순간 만난 지 30분도 안 된 남자 A 의 뺨이라도 때려줄까 싶었다.
그게 말이 되냐고. 이 아이를 어쩌나. 찬물이라도 얼굴에 끼얹어야 정신을 차리려나.
하지만 어쩌긴. 어쩐다고 뭐가 달라질 일이 아니었다.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싶은 이야기들을 꾹 참고 고개를 돌려 내 손에 상처를 본다.
기억은 안 나지만 4살쯤에 생긴 상처다. 나는 엄마랑 둘이 살았는데 4살쯤엔 엄마가 날 업고 호떡 장사를 했다.
엄마는 매번 뜨거운 기름에 손을 가져다 대는 불을 좋아하는 아이가 걱정이었고, 아이는 엄마의 "안돼" "아뜨뜨" "하지 마" 라는 말이 그저 재미있었다. 바쁜 엄마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편쯤으로 여긴 거다.
엄마의 마지막 묘책은, '데여봐야 알지'
결국 내가 뜨거운 기름 판에 손을 가져가는 걸 막지 않았고 호되게 데인 나는 몇 분간의 눈물 바람 뒤에 더이상 위험한 장난은 하지 않았다. 덕분에 손등에 좁쌀만 한 흉터를 얻었지만.
엄마의 이런 교육 방침은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내 고집에 대한 종지부는 늘 " 데여봐야
알지. 맘대로 해"였다. 그것이 아직도 내가 엄마가 좋아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손등에 볼록한 상처를 만지며 말했다.
"그래! 하고 싶으면 자퇴해. 정 못 견디겠으면 그래야지 뭐." 남자 A의 눈이 되려 휘둥그레진다.
"누나는 찬성하는 거예요? 내 맘 알죠? 그쵸?"
"그전에 맛있는 거나 좀 먹고 생각해보자. 그래도 손님인데 대접을 해야지."
선택은 결국 남자 A의 몫이니 나는 그저 고기를 구워주기로 했다.
그 와중에 " 뭐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라며 나서는 게 아직 정신이 남아있나 보다.
나는 어쩌면 작곡이 전공이라던 A가 휴학을 해서 더 좋은 곡을 쓰고, 아픔 속에서 많은 걸 배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충고라며 말하는 "해봐서 아는데"의 방점은 '해봐서'에 찍혀 있어야 한다. 결국, 그 말을 하는 사람도 해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는 뜻 아닐까?
내게도 허망하게 사라진 사랑에 힘들어 할 때 충고를 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연애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며 침묵의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라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 어떤 조언도 소용없었다. 강 건너 구경꾼들의 조언은 건너 편의 시점이기에 절대 완벽히 와 닿을 수가 없다. 밤낮 이불킥을 하고 '인생의 막장이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자책으로 마음을 짓이기고 나서야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를 알게 됐다. 만신창이로 보낸 시간이지만 적어도 상처를 피하지 않고 매달린 용기가 부끄럽지 않다.
그날 남자 A와 우리 둘은 고기 한근 반을 먹어치웠다.
죽겠다던 사람의 식욕이 너무 왕성한 거 아닌가.
안쓰럽지만 각자의 몫만큼 견뎌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