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세상 대부분을 불신하는 자의 차이는 극명하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믿음은
- 사소하거나 중대한 약속을 상대가 이행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
- 비밀을 털어 놓았을 때, 내 진솔함을 겉으로는 의연하게 속으로는 당황하며 이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지에 대한 의심
- 지금 서로에게 가진 확신이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회의
등의 다양한 불확실 속에서 모두 긍정적인 판단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불행하게도 나는 누군가를 믿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그 누군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내가 그 이를 믿게 만들 수 없다. 나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는 사람을 내가 믿기로 했으면 믿는 것과 반대로 말이다.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극도로 불신하게 된 이유는 나 때문이다. 자신이 늘 호불호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일이 자랑이 되어버린 많은 이들과 다르게 나는 누군가에 대한 적대감을 극도로 숨기는 편이다. 훈련소에서 즐거웠던 시간을 마치고 경직된 상태로 자대에 도착했을 때 어느 상병은 여자친구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와 같은 날 같은 중대 같은 소대에까지 배치된 알동기의 여자친구와 내 여자친구 사진을 두고 품평을 하던 그는 내게 물었다.
"여자친구랑 전화하게 해줄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긴 지금 딴 남자랑 모텔에 있을텐데 전화 걸어서 뭐하냐"
그 선임은 나를 처음 본 날부터 자신이 전역하는 날까지 나를 의심했다. 내가 겉으로 하는 행동과 진심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가장 싫고 나를 전혀 믿지 않는 그 선임에게 한번이라도 더 다가갔다. 슬슬 피해다니지 않고 말을 걸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한 마디라도 더 건네고 그가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하거나 싫어하는 내색을 해도 묵묵히 그가 좋아할만한 일들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나에게 품는 마음은 애증이었지만 증오가 훨씬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모두 각각의 이유로 나와 관계가 형성되고 내가 편하게 생활하고 이쁨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었다. 우리는 같은 분대였고 그는 분대장까지 했었기 때문에 나는 그와의 관계가 군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요소였다. 우리는 서로 믿지 않으면서도 여러 사람과 어울려 늘 함께 놀았다. 이윽고 그가 전역하는 날 아침이 밝았고 그는 그 날 밤에 나에게 싸이월드 쪽지를 보냈다. 그동안 미안했고 사회에서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군필자라면 다 알 것이다. 전역 후에 굳이 그런 쪽지는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내게 손을 댄 적도 없고 날 심하게 모욕한 적도 없다. 단지 남들과 다르게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눈치를 많이 줬던 것 뿐이다. 모든 이가 날 좋아할 이유는 없다는 당연한 전제 하에 굳이 내게 사과를 할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그 쪽지는 말하자면 그의 '진심'이었다. 나는 쪽지를 확인하자마자 그를 일촌에서 지웠다.
'결국 속았구나. 내가 너에게 진심이었다고 믿어서 이런 쪽지를 보냈을테니'
정도가 내 심중이었던 듯 하다. 그 상황에 희열을 느끼지는 않았으나 싫고 부담스러운 것을 회피하는 것보다 필요 이상으로 마주하고 한 번이라도 더 대응하는 가식이 때로는 필요함을 느꼈다. 이런 성향은 적을 만들지 않는 일에 아니, 내가 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나를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일에 유용했다.
나는 항상 그 시절의 내 여자친구와만 깊게 교감했다. 내가 연애를 좋아했던 이유는 설레임이나 성적 쾌락때문이 아니라 '육체도 정신도 알몸으로 있을 수 있는 타인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환희때문이다. 세상에 둘 뿐인 시간을 공유하고 난 이후에 완벽하게 타인이 될 수 있는 관계라는 것도 매력적이다. 나는 미련을 보인 적이 없다. 그녀에 대한 감정의 진위 여부와 깊이 정도에 관계없이 우리가 완벽한 타인이 되는 일이 주는 이점은 매우 많았기에 그 부분에 대한 안도감으로 슬픔과 외로움을 혼자서 겪는 방법을 연습했다. 내 안에 가득한 미련이어도 그 것을 새어 나가게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연애를 하는 내내 모든 연애 상대에게 그 점을 이해시키고 연습 시키기도 했다. 나와 사랑했던 모두는 서로에게 미련이 없(이 보이)고 미련이 없는만큼 잘 지낸다. 고 내가 믿는다.
내가 그럴 수 있는만큼 모두가 완벽에 가까운 가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편애하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일을 좋아한다. 편애라고 적는 이유는 분명하다. 나는 마음의 총량에 한계가 있어 관심이 없는 이들과 애정을 가진 이들에게 나누는 감정에 큰 차이를 둔다. 상대방이 나에게 진심인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나같은 위선자가 더 있다고 믿기에 내가 그 것을 알려고 한다고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두를 속이고 있다', '진심은 없고 계산과 이기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몸이 차다가도 내가 믿는 이들의 글을 보면 다시 마음이 따뜻해진다. 세상 대부분을 불신하는 자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여럿 가졌으니 내 심리적 상태는 늘 불안과 편안, 독선과 공감을 오고 간다.
나처럼 혼돈의 카오스에서 오래 지낸 사람은 행동의 절제는 물론 사고의 경계조차 모호해진다. 얼핏보면 허무주의 같지만 나는 확고히 믿는 것이 몇 가지 있기도 하다. 애초에 내가 가진 것이 어떤 종류이고 어떤 이름으로 불릴 수 있고 이런 구분이 마땅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당위성은 줄이고 자의성을 늘리는 것'이 내 삶의 나도 모르는 어떤 방향이었나 싶기도 하다. 매일매일 나를 지배하는 것은 '무언가 쓰고 싶다, 더 읽어야 한다' 이다. 최근에 들게 된 생각인데 글을 쓰고 싶은 또 한 가지 이유는 내가 글을 써야 내 친구들이 여기에 댓글을 달 수 있고 그래야 우리가 또 소통할 수 있으니까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주 가끔 내가 친구로 여기는 사람이 늘기도 하겠지. 늘기를 바라지 않지만 줄어드는 것은 절대 사절이다. 그래서 나는 겁이 나도 글을 써야 한다. 겁의 실체에 대해서 장고(長考)하고 있다. 지난 번 글과 이번 글의 간격은 5일이다. 이 글과 다음 글의 간격은 더 짧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