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시절
아니, 그 보다 더 이른 대학시절로 거슬러 가는게 맞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6년을 통틀어 여자들만 다니는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여대에 합격하고서도 아버지를 잘 설득시켜 남녀공학으로 게다가 여학생 비율이 적었던 경영학과를 갔다. 중고등학교 때는 워낙 평범한 학생이었기에 다른 선배들 눈에 띨 일이 없었으니 그냥 조용히 지나갔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니 상황이 좀 달라졌다. 눈치를 봐야하는 시어머니가 생긴 것이다. 남자 선배들은 다들 잘 해 줬지만 여자 선배들과 있을 땐 왠지 모르게 행동을 조심하게 됐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의 일이다. 남자 동기들과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고 완샷을 외치며 부어라 마셔라 하는데 3학년 여자 선배들이 부른다. 눈치를 보면서 갔더니 맥주컵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는 소주가 음료수냐 술이냐 묻는다. 소주가 당연히 술이지 당연한 걸 왜 물어? 지금이야 그렇게 말할 법도하겠지만 그땐 순진했기에 그 선배들이 그렇게 묻는 의도는 따로 있는 것 같아 눈치를 살피다 결국 음료수라 대답했더니 그럼 마셔 한다. 그렇게 맥주잔에 든 소주를 완샷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엔 그 선배들과도 언니, 동생하며 친해졌지만 여자 선배들과 있을 땐 그냥 말이나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회사에 입사해서는 이러한 관계가 더욱 심해졌다. 여자선배들은 내 행동이나 업무 수행에 있어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남자 선배들은 웬만큼해도 칭찬 일색을 늘어놓았지만 여자 선배들로부터는 지적질과 질타가 날아왔다. 그래서 그 땐 그냥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닌가 싶었다.
사실 난 싫은소리를 잘 못하는 타입이다. 좋은게 좋은 거 아니겠어 싶은 마음에.. 그리고 소심한 A형이라서..그런데 기본도 안 되어 있는 모습을 보거나 네가지 없는 행동을 하는 후배를 보면 나도 모르게 욱 하게 된다.
오늘도 그랬다. 기본이 안 된 후배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데 남자 동료들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다독여 준다. 그리고 나서는 뒤에 가서 여자들이 다 그렇지 하고 쑥덕대는 걸 본 적이 많다. 그 후배를 다독여 주는 남자 동료들 앞에서 나는 그 후배에게 기본이 안 되어있는 걸 창피한 줄 알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기본이 안 되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일을 잘 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을 말하는 거고, 그 조건이 안되면 그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을 하든가 노력을 했는데도 안되면 조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경찰이나 소방관, 군인 이런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사람한테는 체력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직업의 기본은 일단 체력이 아닐까.. 체력이 안 되면 노력해서 체력을 키우면 되는거다. 또 승무원의 기본은 손님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기본이다. 감정까지 어쩌라는 거냐 하겠지만 그것도 노력해서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기본도 안되면서 제복입은 게 멋있어 보여서 그렇게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꽤 봤다.
나이들어서 고지식하다고 할지는 모르겠다. 유리 천장이 아직도 높은 우리나라에서 왜 여자선배들이 여자후배들에게 더 높은 잣대를 들이 댓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각각의 행동 하나하나가 여자 사원 전체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나의 잘못된 행동 하나가 여자들이 다 그렇지 뭐..라는 식으로 일반화되기 쉽기에 더욱 그렇다.
아직 사회 생활에 발 붙인지 얼마되지 않은 후배에게 너무 한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 후배를 아낀다면 아닌건 아니라고 직설적으로 말해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오늘은 순간 욱 해서 성질을 부리긴 했지만, 그 후배가 내가화를 낸 진짜 이유를 알아주기 바라면서, 내 욱하는 성질머리에 나름 핑계 거리를 찾으면서 '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는 말에 반박이 하고 싶어졌다.
유리천정(glass ceiling) :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제용어이다.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음에도 조직 내에 관행과 문화처럼 굳어진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고위직으로의 승진이 차단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말(출처: 두산백과사전)